강서경 작가의 전통과 미술사이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하는 강서경은 전통을 영상, 조각, 설치 등 동시대 미술적 요소로 재해석하고 회화를 재정의하는 작가다. ‘전통/회화/나의 이야기/우리의 이야기/현재/미래/미술/풍경/삶’ 사이의 슬래시를 지워가다 보면 이 예술가의 정체가 선명해진다.

강서경의 작업실에서 보이는 풍경. ‘오성 대감’ 백사 이항복 선생의 집터에서 수백 년 동안 자란 고목과 필운동 일대가 보인다.

강서경 작가의 작업실 옥상에서는 인왕산이 가까이 보인다. 인왕산이 명산인 건 ‘보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나를, 나의 공간을, 나의 땅을 힘차게 품어 안기 때문이다. ‘안는다’는 건 열린 태도다. 이를테면 오성 대감으로 알려진 이항복 선생의 집터에서 자라고 있는 고목부터 작품 속 그리드를 차용한 옥상의 철제 펜스까지, 중요한 것부터 중요해 보이는 것까지, ‘현재’라는 시공간에서 획득한 서사와 가치를 인정함과 다를 바 없다. 겸재 정선이 일상에서 체화한 우리 산하를 그리고는 ‘진경(眞鏡)산수화’라 명명한 지 수백 년 후, 동양미술학도였던 20대의 강서경은 일대를 배회하며 “진경이란 내 걸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태도이자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우리가 보는 대상, 우리와 함께 사는 이들, 우리를 둘러싼 세상, 이 모두의 관계성을 고찰하며 ‘진정한 경치’의 현대적 의미를 고유한 조형적 언어로 연구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강서경식 진경’이란 곧 그녀가 ‘재현’해 보인 결과물인 작품을 관통해 ‘진(眞)’과 ‘트루(True)’의 의미를 ‘인식’하고자 고군분투한 궤적이며, ‘싸울수록 투명해’졌다는 사실이다.

본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강서경은 국내외 미술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한국미술가로는 양혜규에 이어 두 번째로 아트 바젤의 ‘발루아즈 상’을 수상한 것도 계기가 되었고, 오는 5월에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한다는 사실도 한몫했으며, 아트페어 현장에서 갱신되는 작품 수요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제도권 및 시장에서의 활약상은 “애초에 베니스에 가겠다 욕심 내본 적 없고, 내 작품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는 작가에게 새로운 국면이라기보다는 이제껏 고려하지 않은 바를 달리 인식할 수 있는 고마운 경험에 더 가깝다. 그러나 세상이 어떤 작가의 존재를 반색한다는 건 무엇을 표현하는가만큼이나 어떤 메커니즘을 작동했으며, 그리하여 예술과 삶을 응시하는 시선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의 문제를 존중하겠다는 의미다. 전통이라는 과거를 현재 시점으로 소환한 강서경의 신세계를 향한 시선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나날이 새로운 예술가로 거듭 각인된다.

 

일기 쓰듯 일상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면면.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겠어요. 그저 계속 하다 보니 쌓이고, 중첩되었어요. 저는 추상이란 생각이 반복되고 걸러지면서 어떤 상이 나오는 거라 생각해요. 상을 추출하기 위해 작가 자신도, 작업과정도 다 사라지고 남은 어떤 잔여물 혹은 뼈대 같은 거랄까요. 내게 전통은 가장 어렵지만 가장 익숙한 방법론이에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왜 이런 이상한 시간의 축이 계속 돌아가는가 하는 근본적인 궁금증은 난제이지만, 작업을 지속하고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죠. 동시에 지금껏 고민한 것들, 전통에서 얻은 추상적인 방법론들이 바로 그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불러일으킬지 알아내기 위해 또 한번 뒷걸음질해요. 이런 제자리걸음은 내게 매우 중요해요.”

현재 강서경은 “전통의 개념을 영상, 조각, 설치 등 동시대 미술적 요소를 통해 재해석하고, 이로써 회화의 영역을 재구축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회화를 평면에서 해방시켜 입체적 설치로 구축하는 ‘페인스톨레이션’이라는 개념보다 오히려 이 현대적인 작품들이 동양화 혹은 전통에서 출발한다는 사실 자체를 발견하기가 더 어렵다. 오래전 강서경이 동양미술을 전공하게 된 건 “제어할 수 없는 재료들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붓은 내 몸의 일부이고, 같은 먹색도 수만 가지라, 내 힘을 길러야 비로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런 고행의 태도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모호한 전통의 개념을 정면으로 다루는 방법론으로, 더 나아가 회화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었다.

요즘도 미술학도들을 가르치는 강서경은 수업 첫 시간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각’이란, ‘전통’이란, ‘한국화’란 무엇인가. 이는 평생 가지고 갈 고민이다. ‘전통/너의 이야기’, 이 두 가지를 양손에 쥐고 ‘내가 하고 있는 얘기가 뭐지?’라고 저울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통’과 ‘너의 이야기’ 사이 슬래시(/)가 사라지는 순간, 그게 무엇인지 반드시 붙잡아라, 라고 말해요.” 이런 질문은 강서경의 오랜 고민을 ‘나누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재진행형인 작품들.

모호하고, 답도 없지만, 미술을 하면서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게 돼요. 이런 인간적인 방법론이 미술 안에서 적용되는 걸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모호한 구조를 남기는 것. 그게 내게 미술이라는 언어예요.”

“고서화에는 제발(제서와 발문)이 있어요. 그림과 글씨가 늘 함께하죠. ‘한 획을 긋기 위해서는 만 권의 책을 읽어라’ 할 정도로, 그림을 이해하거나 그리려면 글을 꼭 읽어야 해요. 자연스럽게 동양화란 작가의 생각, 사상, 사유를 담는 거라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기보다는 생각하는 걸 만들어내고, 진실된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랄까요. 서 있는 공간, 내 집, 내 작업실, 그리고 나와 함께 사는 타인 개개인의 신체가 드러나는 현재의 ‘풍경’을 고민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동양화는 내게 무언가를 생각하는 공간이, 회화는 그런 공간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어요.” ‘회화근본주의자’ 아니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 강서경은 파안대소했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작업실은 일종의 소우주다. 여기서 강서경은 “그림 그리듯” 오브제를 이리저리 옮기고, 쌓고, 내리는 등의 행위를 통해 색, 레이어, 무게, 재료 등을 실험한다. 캐나다 출신의 어느 작가는 그녀의 전시 공간을 보고는 ‘Living with’라 표현했는데, 완성작과 미완성작이 나란한 작업실을 보니 충분히 납득된다. 작품들의 존재는 마치 언젠가 함께 살았던 듯 미묘한 친근감을 안기며, 작가의 몸이 위치한 공간과 나의 공간, 작가의 시간과 나의 시간 사이 보이지 않는 만남을 주선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총감독 랄프 루고프도 이 작업실을 찾은 적 있다. 지난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작품 ‘땅 모래 지류(Land Sand Strand)’를 인상 깊게 본 루고프가 초청 메일을 보내며 시작된 인연이다. 수제비를 함께 먹으며 나눈 이야기 중 강서경은 특히 ‘Evolve(진화)’와 ‘Openness(열려 있음)’을 기억한다. “이 두 가지, 회화라는 어떤 형식과 틀 안에서 계속 확장되고, 움직이고, 이동한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올해의 주제인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길 바란다(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 안에서 봤을 때, 다른 방법론으로 회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베니스에서 강서경은 두 연작, 현대 언어로 해석한 전통의 개념, 회화적 방법론,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서사를 집대성한 작업을 선보인다. 초기작 ‘그랜드마더 타워(Grandmother Tower)’와 가장 진화한 형태의 ‘땅 모래 지류’는 통의동의 소우주를 출발해 각각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 전시장에 당도하고, ‘흥미로운 시대’의 단서이자 증거로 다시 걸어나갈 것이다.

 

‘Land Sand Strand’, 2012-2019, Partial installation view.

랄프 루고프가 강서경의 복잡다단한 조형언어들을 얼마나 완벽히 이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흥미롭게) 읽기(느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필연적으로) 먼저(언젠가) 알아야 할(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개념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기도 한 ‘사각’은 화선지도, 캔버스도, 책도 모두 사각인 세상을 이루는 현대미술과 전통미술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이자 형식이다. 특히 강서경에게 ‘사각’은 “말레비치의 사각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의 보이지 않는 그리드”를 의미하는데, 그녀의 예술적 사건은 사각의 ‘한 칸’에서 발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칸’은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나 생각을 담은 그릇이 되었다가(‘정(井)’), 두 발 아래 땅이 되었다가(‘검은자리’, ‘자리’), 평소의 생각과 목소리를 쏟아부은 결과물(‘모라(Mora)’)이 되었다가, 전시공간을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지도가 된다.

작업실 한쪽, 캔버스를 눕혀 포개놓은 작업이 눈에 띈다. 언뜻 추상화처럼 보이는 이들에 작가는 ‘모라(Mora)’라 이름 붙였다. 다른 작업에 등장하는 색도 모두 이 모라 페인팅에서 파생했다 하니, 회화적 방법론 중에서도 단연 핵심이다. 언어학에서 차용한 ‘모라’는 본래 최소한의 단위와 음절의 무게를 칭하지만 강서경은 이 현학적 단어를 지극히 사적으로 활용한다. “아, 어, 오 같은 단어를 내뱉듯이, 나만의 주절거림이 담긴 공간이랄까요. 머릿속에 있는데 내뱉지 못하는 작은 찰나의 시간들이죠. 그저 반복할 뿐, 저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매일 일기 쓰듯, 뭔가를 내뱉듯 그려요. 하지만 이 ‘모라’가 쌓이면 결국엔 문장도, 문단도 될 수 있겠다 싶어요.” 강서경은 언젠가 모라 페인팅만을 모은 개인적인 전시를 열고 싶다고 했다.

Moras on the Black Mat’, 2014-2018, Dimension variable, piled up paintings, hanji paper mounted on canvas, ink, gouache, painted steel, plastic wheel, steel bolts, woven dyed Hwamunseok, thread.

‘모라’가 회화적 방법론이자 결과물이라면, 정(井)은 이를 담는 그릇이다. ‘정’은 세종이 발명한 전통 악보 체계 ‘정간보(井間譜)’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음의 길이, 음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몸의 움직임을 기록한 그리드인 정간보의 ‘한 칸’에 착안, 강서경은 모든 사각이 출발하는 기본 조형 단위를 만들었다. 작가의 언어로는 “개개인을 구성하는 움직임과 목소리를 담는 공간이자, 나의 현재와 과거, 작품과 작품을 묵묵히 잇는 우물”이다. 평소 작업실에서 이젤처럼 서 있는 ‘정’은 전시장에서 사각의 프레임이 반복되거나 겹쳐진 조각적인 설치로 구현된다. “사람들이 이 ‘정’을 들고 프레임 너머의 정면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해요.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 이상적으로, 희망적으로 세상을 말할 수도,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상태랄까요. 글과 음악을 공유하는 일종의 체계인 정간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글을 읽으며 음악을, 가사를 읽으며 문학을 이야기했을 텐데, 현대미술작가로서의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희망적인 가능성의 상태가 ‘정’이라면, ‘검은자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태다. “세상사를 목격하다 보니, 쓰러지지 않고 있는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싶었어요.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안전한 땅이 얼마만큼인가, 어느 정도여야 각자의 영역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나 하는 고민도 생겼고요. ‘검은자리’를 그렇게 무너지지 않는 자리로 해석했는데, 실제로도 매우 무거워요. 그저 그 자리 위에 서 있어야 하죠. 그랬더니 관성처럼, 또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웃음) ‘검은자리 꾀꼬리’ 프로젝트는 현실은 이렇지만, 여기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거예요.” 우리는 기적이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이 땅을 두 발로 걷는 것임을 날마다 깨우치며 살고 있다.

세상일이 그렇듯, 처음에는 꿈쩍 않던 ‘검은자리’의 무게에도 익숙해져 이동이 가능해졌고, 혼자 서 있기도 버겁더니 점점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들이 생겨났다. “무거운 ‘검은자리’를 위한 또 다른 땅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강서경은 오래 시도해온 작업, 화문석을 가져왔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만든 화문석을 그림처럼 벽에 걸기도, 철제 프레임에 넣기도, ‘검은자리’ 위에 부서질 것 같은 피부처럼 덮기도 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강서경은 전시공간에서 ‘액티베이션(Activation)’을 선보인다. 공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신체의 상태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퍼포먼스’ 대신 고안한 단어다. “지속가능한 움직임을 통해 자기 신체를, 반경을, 응시하는 방식을, 풍경을 대면하는 방식을 선보이고 공유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인 액티베이션은 종종 화문석을 펴서 움직일 자리를 만드는 액티베이터들의 행위로 시작하곤 한다. 리버풀 비엔날레에서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청년이 함께 화문석과 ‘검은자리’를 밟았다. 이렇게 강서경의 ‘검은자리’는 요크셔로, 스톡홀름으로, 미국으로, 상하이로, 다른 땅으로 이동하며 자리와 풍경을 나눈다. “‘검은자리’는 모든 자리들이 함께 모여 다름을 인정하는, 그 다름이 이룰 수 있는 어떤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Land Sand Strand’, 2012-2019, Partial installation view.

베니스 비엔날레에 선보일 ‘땅 모래 지류’는 회화,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를 뿐 아니라 미술적 언어, 방법론이 녹아든 작품이다. 강서경은 정간보의 그리드 시스템과 함께 역시 조선시대 궁중무인 ‘춘앵무(春鶯舞)’를 가져왔다. 춘앵무는 궁중무용 중에서도 거의 유일한 1인무로, 화문석 위에서 이뤄지는 극히 절제된 춤이다. 약 2m 길이의 화문석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공간인 동시에 움직임을 제한하는 일종의 물리적 경계다. 그러나 강서경은 화문석의 존재를 우리가 바라보거나 서 있을 수 있는, 한정되어 있되 무한히 확장가능한, 한없이 가벼운 동시에 한없이 유연한 일종의 땅 혹은 공간으로 설정했다. “춘앵무는 화문석이라는 사각의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춤의 이야기지만, 저는 지금의 자리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내가 움직이고 싶은 한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땅(Land) 주변에 선 작품과 그 사이사이를 지나다닐 관람객들의 신체 혹은 존재는 모래(Sand) 알갱이가 되어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교류하며 필연적으로 지류(Strand)를 만들 것이다. 그렇게 강서경의 같은 작품은, 다른 곳에서 매 순간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땅 모래 지류’는 ‘검은자리 꾀꼬리’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말하자면 ‘검은자리 꾀꼬리’는 무겁고 버거운 방식의 실험이었어요. 삶의 무게를 안간힘을 쓰며 감당하는 어떤 상태였다면, ‘땅 모래 지류’는 좀 더 가볍게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까워요. 화문석을 유연하게 말아 다른 데로 이동할 수 있듯이요. ‘검은자리 꾀꼬리’ 영상 속 인물들이 힘겹게 ‘검은자리’를 들어 옮기는 반면, ‘땅 모래 지류’의 영상에서는 화문석이 바람에, 손짓에 툭툭 나부껴요.”

한편 ‘그랜드마더 타워’는 ‘땅 모래 지류’와 다른 공간에서 선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 안에서 지표로서 유영할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구축하는 시공간에 대한 시각적 논리의 원형’이다. 동시에 2011년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데다 함께 나이 들어갈 작업이라는 점에서 정서적 원형이기도 하다. 유학 중이던 강서경은 임종을 앞둔 할머니를 찾은 후 그녀의 신체, 나의 무게에서 출발한 몸의 움직임과 반경을 고민했고, 할머니의 앙상하지만 아름다운 신체를 뼈대와 구조로 형태를 풀어냈다. “할머니는 강한 여자였어요. 가꾸는 데 당당하고, 자기 목소리도 확실하셨죠. 그날도 뼈대밖에 남지 않은 몸을 일으켜, 원피스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셨어요. 그 이후 뼈대가 되는 철에 색색의 실을 감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를 떠올리며, 강서경은 자신의 작품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종종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 이 ‘사각의 공간이라는 순간’으로, 우리가 사는 현재를 이야기하는 작은 쉼표를 던지고 싶어요.”

‘사각의 공간이라는 순간’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녀 작품은 늘 시간은 곧 공간이 되고 공간은 곧 시간이 됨을 인정하게 한다. 작업을 위해 춘앵무를 배운 강서경은 “전통무용은 3백65일, 사계절과 함께 동서남북, 팔방을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축지법도 ‘같은 거리를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의 기술’로 사용되지만, 문자 그대로는 ‘땅을 접는 법’이라는 공간의 이야기 아닌가. 그녀가 지금(현재)과 전통(과거)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 새로운 시공간은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혹자의 말처럼 매우 미래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서경의 작품은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Land Sand Strand’, 2018, video still(6:22 minutes).

“지금을 어떻게 잘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건 바로 눈앞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예요.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 제게는 현재와 닿아 있는 미래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땅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요. 학생들과 사각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처럼, 전통에 관련한 방법론을 계속 고민하는 것처럼, 눈 앞의 미래를 더 바르고 아름답게 지탱하기 위한 방법이 중요하다 봐요. 뒤로 잠깐 돌아가서 제자리걸음 하면서 생각하는 시간도 살지 못했기에 모르는 시간이고, 따라서 과거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미래와도 같죠. 이 시간을 축척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속가능한 미래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실제 강서경이 펼쳐 보이는 시공간은 그녀 자신과 살갑게 등을 맞대고 있다. 작업실의 크기는 ‘휴먼 스케일’ 작품에서 비롯되었고, ‘모라’ 페인팅 크기중 55×40cm는 책상에 놓았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크기, 베니스에서 선보일 120×120cm는 팔을 뻗어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최대치다. <발과 달> 전시에서는 “내가 서 있는 곳(발)에서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달)”을 이야기했다. 품에 쏙 안기는 원통에 뜨개질한 실로 옷을 입히고 나무 바퀴를 단 ‘좁은 초원’은 내가 서 있는 곳이 드넓은 초원이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둥근 유랑’에는 유랑이란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계속 내 자리를 돌고 도는 거라는 의도를 담았다.

처음 강서경의 작품을 만난 건 지난 2013년 허름한 한옥 전시장에서였다. 몇 년 동안 ‘그랜드마더 타워’는 나름의 진화를 거쳐 혼자 설 수 있게 되었지만(‘그랜드마터 타워 – 토 Tow’)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작품 키만 한 낮은 천장을 머리에 이고, 낡은 벽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그랜드마더 타워’의 풍경은 실로 멜랑콜리했다. 그럼에도 작품은 의연하게, 보잘것없는 소재에 조각적 위치를 부여하고, 철을 색실로 감고 나무 둥치 아래 가죽을 받치는 등 다른 무게, 온도, 질감의 재료들로 불균형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고아한 ‘할머니 타워’ 앞에서 나는 휘청거리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쩌면 위태로움이 안정을 위해 제거해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강서경의 작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어렵다’인데, 이는 ‘난해하다’보다는 ‘나와는 상관없는’의 당혹스러운 뉘앙스에 더 가깝다. 그러나 작가의 웅숭깊은 작업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술이 우리의 안위에 털끝만큼도 도움되지 않는다는 현대미술에 대한 통념을 의심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돌아오는 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명언이 떠올랐다. “Art is the highest form of hope(예술은 희망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왜 ‘strongest’가 아니라 ‘highest’일까 하는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강함의 정도가 아니라 가치의 정도로 예술을 얘기하고자 한 거장의 의도를 강서경의 언어로 짐작할 수 있었다. “모호하고,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고, 답도 없지만, 미술을 하면서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게 돼요. 이런 인간적인 방법론이 미술 안에서 적용되는 걸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모호한 구조를 남기는 것. 그게 내게 미술이라는 언어예요.” ‘인간적’이라는 건, 인간이 스스로를 가장 가치 있는 상태로 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에텔 아드난, 아그네스 마틴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그때 포착되는 ‘진경(True View)’ 안에서 ‘진정한 순간(True Moment)’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이고 싶다”는 강서경의 ‘제자리걸음’에 내내 동행하고 싶은 명백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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