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지금 일민미술관에서 김용익의 40여 년에 걸친 화업을 돌아보는 개인전 <가까이...더 가까이...>가 열리고 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대안공간운동과 공공미술 등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쳐온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가 된다. 작품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만큼 글쓰기와 말하기에 애정과 실천력을 지녀온 김용익의 풍성한 언어들은 유의미한 발언으로 기능해왔다. 지난 9월 1일 전시 개막일에 가진 기자간담회와 <바자 아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말들을 통해 시대별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 대한 가이드와 더불어 지난 한국 현대미술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 녹음기에 담긴 김용익의 말들을 전시실에 따라 인터뷰로 재구성했다.

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 Harper's BAZAAR Korea 2016년 10월호

일민미술관에서 만난 김용익

1 전시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이 전시된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전시장 두 벽을 차지한 ‘평면 오브제’다. 주름진 상태의 광목 천 위에 에어브러시로 가짜 주름 자국을 낸 이 개념적인 작품은 김용익을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19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큰 세를 떨치기 시작한 단색화의 핵심 인물인 박서보의 사단으로서 <앙데빵당>전, <에꼴드 서울>전 등 당대의 유명 전시에 초대되며 모더니즘 계열의 막내 세대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학부 졸업도 마치기 전인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김용익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청년작가>전(지금의 <젊은 모색>전>)에서 자신의 브랜드와 마찬가지인 ‘평면 오브제’를 접어서 넣은 종이박스들을 출품해 당대 모더니즘 미술에 단절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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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오브제‘와 <청년작가>전에서 선보인 ‘무제’가 설치된 1전시실 전경

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의 일화는 이후 곧잘 인용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전시에서 그 작품을 보니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평면 오브제’로 뭐랄까요, 갑자기 떠버렸죠.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 작가로 선정되고, 한국과 일본에서의 개인전 등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데 제 안에서 계속 드는 생각은 첫째로 더 이상 자기복제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당시 현대미술이 붐이었는데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작가들을 보면 개인마다 자기만의 브랜드를 갖고 있더라고요. 누구는 이런 작업, 누구는 저런 작업 딱 정해져서는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려고 하면 선배들이나 전시 주최 측이 암묵적으로 ‘원래 하던 걸 가져와’ 하는 분위기였죠. 그게 저로서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술 외적인 사회의 상황도 암울했죠. 1979년에 박정희가 암살됐고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군부독재정권의 탄생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어요. 이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현대미술의 매체와 형식을 실험하고 모든 미학적 관심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저는 실존적인 흔들림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지금 일민미술관에서 김용익의 40여 년에 걸친 화업을 돌아보는 개인전 <가까이…더 가까이…>가 열리고 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대안공간운동과 공공미술 등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쳐온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가 된다. 작품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만큼 글쓰기와 말하기에 애정과 실천력을 지녀온 김용익의 풍성한 언어들은 유의미한 발언으로 기능했다. 지난 9월 1일 전시 개막일에 가진 기자간담회와 <바자 아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말들을 통해 시대별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 대한 가이드와 더불어 지난 한국 현대미술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 녹음기에 담긴 김용익의 말들을 전시실에 따라 인터뷰로 재구성했다. 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런 작품은 더 이상 그만하자, 공식적으로 선언한 게 제1회 <청년작가>전이었던 겁니다. 전시 전날 부들부들 온몸이 떨리고 걸으면서도 땅을 딛고 있는지 구름 위에 올라 있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되고 두려운 상태에서 전시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그런 작품을 한다는 건 미술 정치판에서의 자살 행위와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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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오브제‘, 천에 에어브러시, 가변크기, 1977

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 Harper's BAZAAR Korea 2016년 10월호

무제(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 포장상자에 사진잉크, 가변크기, 1981-2011

'두 조각', MDF판에 아크릴페인트 가변크기, 1989

두 조각‘, MDF판에 아크릴페인트 가변크기, 1989

그 말은 박서보 사단과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박서보 화백과 어떻게 지내시나요? 저 때문에 서운하셨을 겁니다. 1985년 한 월간지에 ‘넘어서기 힘든 거대한 산’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잡지에서 박서보 특집을 다루기로 했나 봐요. 선생님이 편집장에게 “김용익한테 나에 대한 회고록을 받으라”고 했던 모양이지요. 처음에는 제가 거부했어요. 화가 나셨겠죠. 근데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유홍진 씨가 당시 편집장이었는데 또 전화가 온 거예요. 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해서 쓰게 됐는데 사실 그 제목은 유홍진 씨가 붙인 제목이에요. 저는 그냥 ‘박서보 선생님을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근데 뭐 맞는 얘기입니다. 제가 그분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주량부터 그렇고요. 그리고 아마 수명도 그분을 넘어서지 못할 겁니다.(웃음)

그 당시 모더니즘의 개념은 ‘전후 한국 사회에서 단색조의 모노크롬 회화를 내세우며 이론적·제도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추상회화’라는 특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더니즘은 예술이 사회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는데 현실을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개념적인 엘리트주의의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결별을 선언한 것인가요? 그때 당시에 ‘세상이 이러니까 내 작품을 바꿔보겠어’라고 의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전 의식과 존재와 실존이 마구 흔들렸다고 할까요? 그랬던 것이 저런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결과로서 유추해보건대 당시의 정치적 격변이 내 무의식 속에서 의식 전체를 흔들어놓았다는 결론입니다. 그때에는 그저 답답하고 이대로는 성에 차지 않는 숨이 막힌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단색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선배 작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실망스러운 행태들을 많이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부상한 단색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너무나 흑역사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웃음)

그 말은 예술가의 삶과 작업을 따로 떨어뜨려 평가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구별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점에서 부정하지 않느냐면,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은 사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예술가의 경우 이런 측면, 저런 측면, 무수한 측면 가운데 일부만이 작품에 반영되어 나오는 거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과 예술작품이 일치될 수 없다는 게 정답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걸 부정하고 싶습니다.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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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김 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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