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스트의 그림

“내 그림은 어렵지 않다.” 지금 여기의 리얼리티와 자연의 섭리, 그 가운데 의미심장한 장면을 그리는 문성식 작가의 작품은 그 말대로 어렵지 않다. 그 어떤 그림보다 깊은 마음의 파동을 일으킨다.

부암동 작업실에서 문성식 작가.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목표를 세웠나?

사람들이 여배우를 생각할 때 세속화된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인식도 배제하고, 여배우라는 패러다임도 빼고 그저 한 생명체로 바라보고 그가 지닌 고유한 숨결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요즘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갖고서 그림을 그린다. 이번에는 실제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렸는데, 어떤 경험이었나?

보통 작업을 할 때 모델을 앉혀놓고 그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일단 모델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들고, 성격상 타인을 몇 시간씩 앉혀놓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해본 적이 많이 없다.(웃음)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내 그림에서 ‘경험’이라는 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 같은 경우는 어려운 점이 많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말고 해보자, 해서 제안을 승낙하게 되었다. 다섯 명의 배우 모두 한 차례씩 드로잉 미팅을 했는데 어쨌든 회화적 대상을 직면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일어나고 못 봤던 면을 보게 되는구나,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인물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걸 경험했다.

‘도시와 새’, 종이에 아크릴릭, 37×69.3cm, 2015,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화가에게 본다는 것, 경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대상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 체험과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사진을 보고 그리는 일은 사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점을 이용해 게르하르트 리히터 같은 경우엔 사진이 표현하는 실체와 멀어지는 상태를 오히려 즐기기도 하고, 현대회화에서 그와 같은 다양한 시도들도 있는데 나는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리얼리스트에 가깝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관심이 많고, 대상의 온전한 실체와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싶다. 근거가 없는 그림, 그저 이미지로만 접하고서 그린 그림은 영락없이 좀 뜬다. 미끄럽고, 재미가 없다. 내가 누군가를 직접 만나면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그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게 되잖나. 그 판단이 근거여야 하는 거다. 에너지원이랄까? 이미지를 통해서는 그게 안 생긴다. 내 작품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게 있고 안 드는 게 있는데 그걸 판가름하는 요소가 바로 근거가 확실한가, 하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경험하지 않는 걸 그릴 때 그림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직접 대면하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생생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가 가장 열정을 갖고 있는 게 바로 초상화라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사진과 같은 유사성이 아니라 우리의 열정적인 표현력에 따라 시도해보려 해.” 다섯 명의 배우를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지 않았고, ‘형태 변형’을 시도했다.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여배우들을 그리면서 아름답게 그리지 않은 이유는 표면의 묘사 그 너머의 이면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과 ‘이해’를 위한 관찰이 필요했던 거고 그림에 필요한 요소들을 모은 후에는 내 스타일대로 변형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천우희 씨의 개성적인 외모와 인상적인 느낌을 위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입술 색깔을 자줏빛으로 바꾸었고, 윤여정 씨의 피부톤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 반 고흐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시간과 그때의 상황에 자신을 꿰어내는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니까 지루한 터치가 없다. 모든 걸 직면해서 그렸으니까. 매뉴얼화되면 금방 지루해진다. 난 그 방식이 미래적으로 느껴지고 회화가 가진 미래성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의 몸’, 종이에 아크릴릭,112×76cm, 2013,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직사각형정원’, 캔버스에 아크릴릭,112×324cm, 2004,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작별’, 종이에 연필,22.7×37cm, 2014,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화면에 투사되고 그것을 그린 이가 떠나도 그 화면에 남아 있는 것은 참 마법 같은 일이다.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그림을 열심히 해보는 것이그리 의미 없을 것 같진 않다. 드로잉 에세이 ‘굴과 아이’ 중에서

임수정, 천우희 배우가 공통적으로 당신의 연필 드로잉을 좋아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당신 역시 2002년 작인 ‘집’과 ‘과부의 집’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대학교 2학년 때 효자동 자취방에서 ‘과부의 집’을 완성했다. 젯소(캔버스에 애벌로 바르는 흰 물감)를 칠해둔 면 천에 사다 놓은 재료가 없어 연필로 김천에 살던 시절 과부가 된 옆집 할머니를 그린 그림이었다. 마당에 잡초가 수북이 자라났고 밤에는 TV를 켜놓고 주무시는지 불이 깜빡깜빡거렸다. 천 위에 연필은 안착이 잘 되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려보려고 해야 했고 그 노력의 흔적이 회화성을 만들어냈다. 꼬질꼬질함과 버벅거림이 그대로 노출된, 그리는 자의 정신을 비교적 오염 없이 반영하는 연필 선의 매력을 알게 됐다. 구도와 구성은 알차고 선들은 과감하고 잡초나 사람의 표현이 순진하고 정직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그려도 재미없게 그려지는 시절을 만났다. 두 배우와 그런 상태에 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연기도 마찬가지라고, 마음속 부담감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자유롭게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이곳 작업실에 나붙은 초상화들 중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웃음) 젊은 사람보다 늙은 사람을 그리는 게 훨씬 쉽고 흥미롭다고 얘기했는데 왜 그런가? 일단 기술적으로 젊고 매끈한 사람의 피부를 그리는 게 정말 쉽지가 않다.(웃음) 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인간의 한계와 욕망을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고, 어떻게든 그 속도를 늦추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결국에는 시간에, 죽음에 인간이 무릎 꿇는 흔적들 거기에 관심이 발동을 한다. 지금 작업실에 걸려 있는 저 늙은 정치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제아무리 드높은 권력을 누렸던 자라도 결국엔 늙음을 극복할 수는 없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사람이 등장하든 풍경을 그리 당신의 그림은 얄궂은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배우들도 모두 당신의 그림에서 야릇하고 짓궂은, 그러면서도 따뜻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중학교 때까지 경북 김천에서 자라서 고등학교 때 평창동에 있는 서울예고를 다녔다. 그 간극이 상당하지 않았겠나? 주말에 고향집에 가면 동네 사람들 행색은 초라해 보였고 서울에 오면 상류층 집안의 아들딸들과 학교를 다니는 웃기는 삶을 살았다. 그때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세계관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는 것 같다. 세상은 아름답고 슬프고 무섭고 추하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결국 아름다움이 있지 않나. 이런 세상에서 내가 느끼고 경험한 세상을 표현하는 일 말고 인간이 달리 할 일도 없는 것 같다.(웃음)

‘별이 빛나는 밤에’,종이에 과슈,60.5×126cm, 2016,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청춘’, 종이에 잉크,42×29.4cm, 2013,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더위의 냄새’,캔버스에 아크릴릭,24×19cm, 2016,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종이에 아크릴릭,112×76cm, 2013,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일단 신윤복과 김홍도에서 시작해보자.

신윤복은 캐치하는 게 세련된 화가이고, 김홍도는 테크닉이 훌륭하다. 에지 있고 스토리텔링이 매력적이라 신윤복을 좋아하는데 그 예민함이나 얄궂음에 있어 나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정선은 닮고 싶은데 나보다 훨씬 선이 굵고 호방하다. 박수근과 이중섭은 내가 길을 헤맬 때 지향점이 될 수 있는 작가들인 것 같고, 김환기도 좋아하는데 나랑은 기질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피터 브뤼겔, 히에로니뮈스 보슈, 한스 멤링, 한스 홀베인…. 좋아하는 작가는 너무 많다. 요새는 중세 미니어처 페인팅이라 그러나? 책에 그려진 세밀화 같은 걸 많이 구경한다. 아마도 수도사들이 그린 그림이었을 텐데, 양식도 나이브하고 원근법을 적용하지 않으며 공간 해석이 자의적인데도 굉장히 흥미롭다.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에 넣다 보니 대체로 땅이 서 있다.(웃음) 인도나 터키, 유럽, 한국의 풍속화도 디테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스토리나 인물을 집어넣기 위해서 궁리한 방식들이 대체로 비슷하다. 거기서 흥미로운 회화성을 발견하고 오히려 현대적으로 보여 즐겨 본다.

얼굴을 그리는 기법이 조금씩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아시아적인 색채가 있고 내 주변의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형태에서 문성식적인 변형이다.표면의 묘사를 넘어이면의 것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관찰, 그것을 통해 표면이 증식해나간 것 같은 느낌.그리고 인간에 대한 나의 시선이 들어 있어야 한다.드로잉 에세이 ‘굴과 아이’ 중에서

작품 활동의 초반부터 큰 주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귀의 전정기관이 고장이 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유명세에 시달리는 게 일의 상당 부분인 배우들과 그런 점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심리 치료를 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웃음)

불안이 너무 심했다. 그 때문에 어지럼증이 생겨서 정말 힘들었는데 심리 치료를 통해서 실마리를 찾았다. 여배우로 사는 게 쉽지 않은 일일 거라는 걸 대강은 짐작할 수 있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면 몸의 병처럼 하루 빨리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내년 3월로 예정된 국제 갤러리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15년 출간한 에세이 <굴과 아이>에서 이 구절이 정말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작가들이 선망하는 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 그 전시 공간에 대한 선입견이 부풀려진 만큼 작품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지금 현재의 내 상태보다 나아 보이고 싶은 욕심이 나서 그림의 스케일이나 소재를 잘못 결정하게 되기도 한다. 이래야 할 것 같은 마음,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면서 그림을 그리는 본래의 동기는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는 퓨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마음속에 ‘그럴듯하게 해야 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게 보인다. 남을 놀래주고 싶은 저의, 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니까 누구나 욕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그릴 때 좋은 작품은 나오기 힘들다. 내가 두산 갤러리에서 한 전시를 준비할 때 처음에 그랬다. 오랜만에 하는 데다 공간이 크니까 ‘떡하니’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내 그림이 더 크지?” “내가 더 붓 잘 놀리지?” 그런 거.(웃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것의 부질없음을 느낀다. 그때 정말 용을 써서 그런 단계를 간신히 벗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컨트롤이 되는 규모에서 (전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그림이 안 무서울 테니까. 개인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은 6개월 동안은 내 마음의 순방향을 따라서 가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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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Kim Seongwoong, Chun Young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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