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은 어떻게 쇠퇴하는가?

오늘날 미술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컬렉터가 어떤 작품들을 기증하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다. 컬렉터와 미술관을 둘러싼 흥미로운 기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증자를 찾아라.” 장기기증협회의 슬로건이 아니다. ‘박물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현대박물관들의 화두다. 지난 3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 <르 몽드>는 퐁피두 센터 40주년 기념 기사를 게재했다. 퐁피두 센터와 경쟁 관계에 있는 뉴욕의 모마, 런던의 테이트 모던, 마드리드의 레지나 소피아를 비교해가며 왜 퐁피두가 더 이상 핫한 박물관이 아닌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기사다.

40주년 기념 기사치고는 암울하다. 제목 그대로 ‘박물관의 전쟁’에서 퐁피두는 여타의 박물관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 박물관 구석에 송곳 하나만 꽂아 놓아도 화제를 불러 모으는 천재적인 마케팅 능력의 테이트 모던이나 장 누벨의 지휘 아래 새 건물을 올린 레지나 소피아의 막강한 재정 능력, 크고 작은 행사를 조직해 뉴욕의 사교계에서 많은 재정 지원을 끌어내는 모마의 영민함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퐁피두 센터가 컬렉터들의 기증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물관의 전쟁에서 승리의 왕관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증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현대미술 시장이 활성화된 이후로 손꼽힐 만한 대가의 대표작들은 박물관의 일 년 예산을 넘어선 지 오래다. 결국 컬렉터들의 기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현대미술관들은 컬렉터들의 관심과 기증을 이끌어내는 데 사활을 건다.

오늘날 박물관 큐레이터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유력 컬렉터들과 친분을 쌓아 기증을 성사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측면에서 퐁피두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있다면 모마나 테이트 모던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국립박물관임에도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오르세 박물관일 것이다.

오르세 박물관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작품에 특화된 박물관이다.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파가 워낙 대중적으로 유명한 탓에 관객에게 인기 만점이지만 동시에 바로 이 점이 오르세 박물관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미술시장에서 정점을 찍은 인상파의 작품 가격은 그 이후로도 별다른 변동이 없다. 2차 대전 이후 유실된 작품이 많아 그 숫자가 많지 않은 데다 워낙 그 가치가 절대적이다 보니 컬렉터들도 좀처럼 시장에 작품을 내놓지 않는다. 게다가 인상파 컬렉터들은 2차 대전 이후 3세대에 걸쳐 은밀히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어디에 무슨 작품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마디로 예산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다. 종국적으로 기증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애당초 오르세 박물관의 자랑,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의 작품 역시 기증작이다. 1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재력을 쌓아 파리로 진출한 유태인 은행가 가문이었던 카몽도 가의 장남 이작 카몽도(Issac Camondo)는 당대의 재력가들과는 사뭇 다른 취향을 가진 이단아였다.

가문의 일원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더 중시했던 이작은 집안의 장남이자 상속자였지만 결혼을 거부했다. 보나마나 엄격한 분위기에서 자란 고지식한 유태인 여자와 집안의 지위와 잇속에 맞춰 진행될 정략결혼을 받아들이기에 그는 너무나 담대한 취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오페라의 후원자였던 그는 가수나 평론가들을 만날 수 있는 허름한 선술집, 평판에 신경을 쓰고 살던 당시 부르주아들이 감히 발을 들이지 못했던 카바레와 목로주점에도 거침없이 드나들었다.

이단아였던 그가 역시 당시 미술계의 이단아로 등장했던 인상파 회화에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드가의 ‘경매장’, ‘목욕하는 여자’, 모네의 ‘루앙 대성당’ 시리즈,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르누아르의 ‘밀짚모자를 쓴 소녀’, 피사로의 ‘목동 소녀’, 세잔의 ‘카드 치는 사람들’ 같은 현재 오르세 박물관을 대표하는 걸작들은 모두 이작 컬렉션의 일부였다.

1911년 세상을 떠난 이작은 유언장을 남겨 그가 소장했던 인상파 컬렉션을 모두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고 이 작품들이 후에 오르세 박물관을 창설하는 근간이 되었다. 아쉬운 점은 인상파의 가치가 오늘날 같지 않았던 시대의 기증이었던 터라 이작 카몽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

카몽도 이후에도 오르세 박물관은 기증 컬렉션을 바탕으로 설립된 박물관답게 다양한 컬렉터의 기증을 받아왔다. 그리고 2013년 오르세 박물관은 그야말로 잭팟을 맞았다. 텍사스 출신의 컬렉터인 마를렌, 스펜서 헤이(Marlene, Spencer Hays) 부부가 자신들의 전 컬렉션을 오르세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펜서, 마를렌 헤이 부부

한 개인의 컬렉션 기증이 이토록 큰 화제가 된 적도 드물 것이다. 오르세 박물관은 기증 소식을 전하자마자 기증 기념 특별 전시를 열었다. 오르세 박물관의 로고보다 기증자인 헤이 부부의 이름이 더 크게 실린 포스터가 파리 곳곳을 장식했다. 직접적인 수혜자인 오르세 박물관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에서도 이 경사에 발벗고 나섰다. 프랑스 문화성은 ‘1945년 이후 가장 큰 개인의 박물관 기증’이라는 홍보물을 뿌렸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의 초상(Portrait de Chaïm Soutine)’, 1917, 패널에 유채, 79×54 cm, ©droit réservé

에드가 드가, ‘등을 씻는 여자(Femme S’épongeant le Dos)’, circa 1895, 판지 위 종이에 파스텔, 70×60cm ©droit réservés

총 6백여 점의 기증 예정 작품 가운데 첫 번째 기증 작품 1백87점이 오르세에 당도한 것은 2016년. 기증식에는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했으며 그 자리에서 헤이 부부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에두아르 뷔야르(Eduouard Vuillard),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등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나비파의 대표작을 망라한 컬렉션, 총 6백여 점에 추정가만 35억 유로짜리 기증이니 이 정도 환대는 당연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헤이 부부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박물관 대신 프랑스의 오르세 박물관을 선택했을까?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박물관만의 독특한 문화재 관리 체제를 선호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프랑스의 박물관은 한번 컬렉션에 편입된 작품을 임의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 박물관의 컬렉션에 등재되는 즉시 문화재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다.

에두아르 뷔야르, ‘걷는 소녀들(Young Girls Walking)’, circa 1891, Oil on canvas, ©John Schweikert Photography

자유로이 작품을 팔 수 있는 미국이나 영국의 박물관과는 다르다. 실제로 헤이 부부의 컬렉션 중 하나인 뷔야르의 ‘산책하는 소녀들(Les Fillettes Se Promenant)’은 영국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가 경매에 내놓은 작품을 사들인 것이다. 즉 프랑스의 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한다면 컬렉터로서는 자신이 기증한 작품이 천덕꾸러기처럼 시장에 재출몰할 걱정 없이 고유한 컬렉션 자체로 보존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헤이 컬렉션의 작품들은 그 어떤 박물관이라도 쉽사리 처분할 수 없는 그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 이후 미술계는 인상파 후기에 해당하는 작품들, 그중에서도 당시 생활의 정경을 잔잔하게 그려낸 나비파에 주목해왔다. 2000년대 이후 뷔야르나 보나르 등의 나비파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전시는 대성공을 이뤘고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1980년대부터 나비파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해온 헤이 부부의 컬렉션은 이 과정에서 자연히 관련자들 사이에 유명세를 탔는데, 이들 부부의 컬렉션을 빌리지 않고서는 보나르나 뷔야르의 제대로 된 전시를 기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사가들은 바로 여기에 헤이 부부가 오르세 박물관을 택한 이유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마를렌과 스펜서 헤이는 미국 댈러스에서도 무려 1백15킬로미터나 떨어진 텍사스의 깊은 시골 아드모어 출신으로 책 방문 판매로 시작해 사업체를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가장 가까운 박물관을 가려고 해도 1백20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어느 정도 재산을 일구자 남들처럼 집 안을 장식할 그림을 사들였다.

첫 구매는 당시 내슈빌의 유력자들이 그러하듯 테오로드 로빈슨(Theodore Robinson)이나 칠드 하삼(Childe Hassam) 같은 1970년대 인기 있었던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던 1971년 이후 매해 파리를 방문하면서 부부는 파리의 풍경을 잔잔하게 그린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을 발견한다.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숲속 카페/ 파리의 정원(Cafédans le Bois/ Jardin de Paris)’, 1896, 캔버스에 유채, 40×33cm, ©ADAGP, Paris

1980년대는 일본인들의 열정적인 구매 행렬 덕택에 인상파의 가격이 기록을 갱신했던 해로 당시 나비파 작품은 인상파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며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뷔야르의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의 작품을 사들였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현 시카고 미술관의 글로리아 그룸이나 나비파 전문 갤러리스트인 와일드 스텐, 와링 홉스킨 등의 전문 갤러리스트와 친분을 쌓게 된다.

페르낭 플리(Fernand Pelez), ‘찌푸린 얼굴과 불행: 곡예사들 (Grimaces et Misères: les Saltimbanques)’,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114.6×292.7cm ©droit réservés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Homard)’, 1883, 캔버스에 유채, 38×55cm ©droit réservés

뉴욕의 아파트 식탁 위에 걸어놓을 용도로 카유보트의 1883년 작 ‘가재(Homard)’를 구입했던 부부는 미술 관계자들을 통해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63점의 뷔야르 데생을 수집하고, 19세기에 발행된 예술 서적들의 초판을 수집하는 학구적인 컬렉터로 거듭났다.

헤이 부부가 현 오르세 관장이자 손꼽히는 나비파 전문 연구가인 기 코즈발(Guy Cogeval)을 만난 것은 2006년 오르세 박물관에서 열린 모리스 드니의 전시에 작품 두 점을 빌려주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좁디좁은 미술계에서 이들이 서로를 몰랐을 리 없다.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 ‘첫 발걸음 – 공원의 7번째 패널 (Les Premiers Pas – 7e Panneau des Jardins Publics)’, 1894, 캔버스에 템페라화, 213.4×68.5cm, ©droit réservés

2차 대전 중 나치의 소유로 넘어간 후 그 행방이 불분명했던 뷔야르의 ‘공공 정원(Jardin Public)’ 시리즈 중 한 점인 ‘첫 번째 발걸음(Les Premiers Pas)’이 경매에 나온 것은 2001년이었다. ‘공공 정원’은 1894년 뷔야르가 후원자였던 알렉산드르 나타송의 집 안을 장식하기 위해 그렸던 9점의 연작이다. 오르세에서 5점, 클리블랜드 박물관, 휴스턴 박물관, 브뤼셀 박물관이 한 점씩 가지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이가 빠진 마지막 작품이 경매시장에 나온 것이다.

당시 오르세 관장이었던 앙리 로리에트는 기 코즈발의 추천을 받아 이 경매에 참여했는데 결국 작품을 낙찰 받은 것은 헤이 부부였다. 당시 낙찰가는 4백만 유로로 오르세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이었다. 나비파 전문가였던 기 코즈발이 경합을 벌인 헤이 부부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었던 것이다.

네슈빌에 위치한 헤이 부부의 응접실 전경 ©John Schweikert Photography

2006년 이후 이들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워낙 관심사가 같다 보니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헤이 부부가 내슈빌에 프랑스의 그러넬 가에 위치한 누아무티에 저택을 본뜬 프랑스풍 저택을 세우면서 기 코즈발이 막후에서 헤이 부부의 가까운 조언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헤이 부부의 컬렉션 기증에는 오르세 관장인 기 코즈발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헤이 부부의 컬렉션은 2016년을 시작으로 해마다 뉴욕의 아파트와 내슈빌의 저택을 떠나 오르세 박물관에 안착하게 된다.

기 코즈발과 헤이 부부의 컬렉션에 얽힌 스토리는 오랜 시간 컬렉터를 지켜보며 컬렉션을 함께 성장시킨 큐레이터의 정성이 기증 전쟁에서 승리하는 열쇠임을 보여준다. 꼭 지구 건너편에서 열리는 컬렉터의 작은 전시에도 친분을 쌓기 위해 한 트럭의 큐레이터를 보내고, 요란한 파티를 열어 시선을 모아야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예산이 부족한 박물관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르 몽드>의 지적처럼 만성적인 예산 부족이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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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 지은(오브제 경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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