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포스트 대안 공간

최근 서울 일대에 지역을 불문하고 작은 전시 공간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자연히 이곳들을 기존 미술 제도를 벗어나 탄생한 대안공간의 다음 세대 아이들이라고 짐작했으나, 그들은 스스로를 대안공간이라 자칭하지 않기로 한 듯하다.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한 물음엔 플랫폼, 이니셔티브, 쇼룸 등의 제각각의 답변을 내놓았으나 많은 경우 정의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피치 못할 시에는 ‘전시 공간’이라는 중성적인 표현으로 일컫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안공간 이후, 사라진 대안에 부쳐 현재 이들은 빈 곳(空間)에 무엇을 채우는 중인 것일까?

합정지구. ‘어떤 전야제’ 전시 전경, 2017-2018.

똑같이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도 그 운영 목적이 영리의 추구인지 아닌지에 따라 전자는 영리 공간, 후자는 비영리 공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시 작품을 판매해 수익을 올리는 것이 목표인 화랑(갤러리)을 대표적 영리 전시 공간으로 볼 수 있고, 전시와 함께 연구와 교육의 기능을 갖는 미술관을 비영리 공간의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오랜 역사의 화랑과 미술관에 비해 대안공간은 아주 최근에 생긴 움직임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미술계를 양분하던 미술관과 화랑이라는 주류의 틀을 거부하고 예술가, 기획자가 실험적 미술을 선보이는 ‘대안공간’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술가 집단이나 큐레이터 그룹이 주축이 되어 발생시킨 이 대안공간은 상업 갤러리와 미술관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시각예술을 선보였다.

한국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는 대안공간의 양적 증가가 두드러졌던 시기다. 제도가 끌어안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소개되었고, 새로운 담론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다. 주류 미술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고 상업적 취향에 포섭된 미술을 거부했다.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쌈지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등을 이 시기 대안공간의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비영리 공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미술관과 화랑에서 대안을 찾은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미술관이라는 기관의 배후에 자리해 실질적 결정권을 갖는 국가(혹은 지자체)와 기업이라는 막강한 제도적 영향력으로부터의 대안이었으며, 둘째는 상업 갤러리라는 자본주의 게임에 길들여진 시장미술로 편입되지 않기 위한 대안이었다. 기성미술, 주류미술의 영토에 들어가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안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플랫폼의 번성은 작가들이 실험적 미술을 시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그러나 우후죽순 생겨났던 대안공간들은 2000년대 말 서서히 사라져갔고 이제는 몇몇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전면에 내세웠던 ‘대안’이 스스로를 전복시켰다. 대안공간을 통해 주류로 발돋움한 작가의 작업은 이내 제도권 미술에 흡수되어 미술관에 소장되거나 상업 갤러리에서 판매되었다. 대안공간의 주요 순기능 중 하나였던 신진작가의 발굴과 전시 기회 마련이라는 취지 또한 대부분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이행되었다. 새로운 작가의 인큐베이팅 기능이 약해지고, 제도권의 미술관과 갤러리가 대안공간의 주 콘텐츠였던 다원예술과 퍼포먼스 등의 실험성을 수용함으로써 제도의 ‘대안’적 기능을 잃어갔다. 대안공간의 위치가 미술 신에서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비영리’ 공간을 추구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경제적 어려움도 대안공간 소멸의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아카이브봄. Studio COM  ‘시티 코르타니아’ 내외부 설치 전경, 2017. 사진: 조재무

아카이브봄. 문이삭 개인전 ‘Passion. Connected.’ 설치 전경, 2017. 사진: 조재무

산수문화. 김학량, 정재호 2인전 ‘자화상’ 전시 전경, 2018.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생겨난 신생 공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굳이 ‘대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듯하다. 한 전시 공간 디렉터의 “대안이 무의미하니 대안공간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다소 냉소적인 답변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시 공간들은 주로 젊은 기획자나 작가들 그룹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2000년대 출범한 대안공간과 운영 방식이 유사하다. ‘아카이브 봄’, ‘산수문화’가 이런 방식을 취하며, ‘합정지구’는 권진 큐레이터와 이제 작가가 공간 운영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다양한 영역의 창작자들과 협업하고 연대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영등포 ‘커먼센터’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 들어온 전시 공간 ‘위켄드’와 ‘2/W’ 역시 고정된 디렉터의 역할을 지양하며 다양한 참여자들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한 결과를 목표로 한다. 독립기획자가 단일 운영하고 있음에도 ‘기고자’는 전시에서 외부 기획자와 작가를 초대하고 매칭해 함께 전시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위켄드. 권시우, NNK(윤태웅) 기획전 전시 전경, 2018.

기고자. 허연화 개인전 ‘뷰 포트’ 전시 전경, 2017. 사진: 전병철

기고자. 김효재 개인전 ‘수직 동기화’ 전시 전경, 2017. 사진: 전병철

많은 공간이 기획자, 작가, 디자이너, 사진가 등과 함께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운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런 방식을, 한 명의 기획자 혹은 디렉터 체제가 야기할 수 있는 독단적 기획 방식을 탈피하고 병렬적 조직 체계로서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도모하기 최적화된 체제로 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익 모델이 거의 없는 특성상 인건비 조달 문제를 겪는 이런 소규모 공간들이 최선으로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상업화랑. 홍장오 개인전 ‘우주정물’ 전시 전경, 2017.

오뉴월. 수잔 엔커 개인전 ‘생태계 블루스: 흐트러진 지구를 수선하기’, 2017.

기획자의 큐레이터십으로 공간을 끌고 가는 경우는 ‘오뉴월’, ‘시청각’, ‘상업화랑’을 들 수 있다. 이 공간들의 공통점은 전시 공간의 디렉터가 독립기획자로서 미술계에서 입지를 다져 기획자 자체가 공간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공간들도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전시를 선보이기도 하나, 기획자의 뚜렷한 방향 제시로 공간의 정체성이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오뉴월의 서준호, 시청각의 안인용·현시원, 상업화랑의 양찬제는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전시 공간 이외에서도 독립큐레이터, 심사위원, 평론가 등으로 네이밍을 구축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시청각. ‘2분의1’ 전시 전경, 2015.

기획자–작가, 혹은 작가 그룹, 독립 기획자 주체의 운영체제는 기존 대안공간과의 뚜렷한 단절점을 보여주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 대다수 전시 공간들의 설립 목표는 실험적 시각예술 작업 혹은 전시 방식을 선보이고, 기존 제도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호출하는 것으로 1990년대 말 대안공간이 주창했던 탄생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계에서는 이런 소규모 전시 공간들을 1세대, 2세대, 3세대 대안공간이라고 구분 지으며 대안공간의 의미 확장을 시도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다수 신생 ‘전시 공간’들과 예전 대안공간들의 가장 큰 온도차는 영리 활동에의 결벽증이 희미해진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영리’ 공간을 표방한 이상, 이 전시장들이 전시를 지속해나갈 수 있는 연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자체의 문화재단 등을 통한 지원기금 마련이다. 이러한 공공 기금은 아티스트피(Artists’ Fee), 설치, 운송비, 인쇄비, 장비대여료 등 전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금을 제공한다. 이 자금은 초기자본이 약한 독립기획자나 작가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산 방식의 복잡성, 그리고 1년 연간 단위의 기금 신청 방식으로 장기적 프로젝트보다 단기적 성과를 내는 이벤트만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기금에 의존하는 이러한 작은 단위의 전시 공간 스케줄이 재단 기금의 신청, 발표, 수령, 정산의 스케줄대로 일률적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지적을 낳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이러한 공간들의 독자적 생존을 위해서는 재단기금 이외에 사적 후원금이나 나름의 수입이 필요하다. 1990년대 출범해 현재까지 대안공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아트 스페이스 풀(구 대안공간 풀)’은 후원회를 중심으로 한 모금으로 운영비를 충족하고 있는 대안공간의 지속가능한 모델 중 하나다. 또한 이태원에 위치한 ‘아마도 예술공간’은 과거 ‘꿀 & 꿀풀’이라는 복합문화재단으로서 출범해 재단기금 이외에도 임대료 지원, 메세나를 통한 기업 후원, 그리고 개인적 후원 등으로 오랜 기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예술공간. 이우성 개인전 ‘Quizas, Quizas, Quizas’ 전시 전경, 2017.

그러나 이러한 재단기금 외의 사적 후원금을 받지 못하는 전시 공간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금으로 충족되지 않는 운영비는 운영자가 외부 전시 기획료, 강연료, 원고료, 심사비 등으로 마련한 돈을 다시 공간 운영에 쏟아붓는 식으로 메우기도 한다. 몇몇 공간은 대관이나 카페 운영 등으로 수입을 얻는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공간 운영자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장기적 운영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했다. ‘기고자’의 디렉터인 임다운은 2015년 공간을 연 이래로 2017년 상반기까지 운영자의 사비로 공간 운영을 지속했노라 술회했다. ‘오뉴월’의 서준호 또한 운영 지출의 많은 부분을 개인이 외부 활동으로 벌어들인 기획료나 컨설팅 비용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 공간의 기획자들이 외부적 활동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원인은 그들이 전시 공간 운영자로서 커리어를 인정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간 운영을 위한, 공간 운영에 의한 ‘돈 넣고 돈 빼기’ 방식은 지속적, 자율적 공간 운영을 위한 효과적 방식으로 보기는 어렵다. 많은 전시 공간들이 한 입으로 토로하고 있는 운영의 재정적 어려움은 또 한편 이전에 있었던 대안공간의 몰락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때문인지 최근의 전시 공간들은 전시한 작품의 상업적 거래에 있어 지나친 결벽증적 반응도, 사업가 같은 탐욕적 행태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 대안공간과 최근 공간들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영리 추구에 관한 입장에서 벌어진다고 본다. 대안공간의 탄생에는 기존 시장미술에 관한 반감, 상업미술로의 순종적 흡수에 대한 유감이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기에, 재화로서의 미술 형태를 거부하고 보다 실험적인 장르에 도전했다. 때문에 소위 ‘안 팔리는 작업’을 해야 대안공간에 어울리는 작가이며 그것이 곧 실험적인 작가다라는 인식이 ‘대안공간형 작가’들 사이 팽배해졌다. 대안공간은 비영리성을 표방하며 그것을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곳이었다.

때문에 나는 이 글의 기획 초기에 기획자와 예술가가 자발적으로 조직한 이 ‘전시 공간’들이 자연히 대안공간과 맥을 함께하는 ‘비영리’를 지향할 것이라는 게으른 오류에 빠져 있었다. 당황스럽고도 흥미로웠던 점은 여기에서 소개한 많은 전시 공간들이 비영리 공간을 소개한다는 칼럼의 취지에 당혹감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비영리 공간이 아닌데요….” 이어서 들어본 이곳들의 성격은 비영리보다 ‘미(未)영리’에 가까웠다. 즉, 수익 추구를 지양하지는 않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대안공간의 미술이 상업미술에 대항하기 위해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방향으로 흘렀다면, 그 이후의 공간들은 그저 (하고 싶은) 실험적인 미술을 하다 보니 잘 팔리지 않는 결과가 나왔노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뉴월’은 8년이나 이어온 전시 공간을 비영리 성격으로 정의하는 데에 특히 주저했다. 준호는 2014년부터 ‘오뉴월’을 주식회사로 등재했다며 조형물 사업, 아트페어 참여 등으로 작가들의 프로모션 역할과 동시에 수입을 추구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는 국외 인력과의 협업으로 한국 작가들을 알리는 계획을 하고 있다며 큐레이터로서의 역할과 함께 공간 운영의 지속을 위해 영리 사업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음을 역설했다.

space xx. 정기현 ‘당기세요_open your mind’ 전시 전경, 2018.

이들 중에는 애초부터 시각예술의 상업적 기능을 전제로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곳도 있다. ‘상업화랑’, ‘소쇼룸’, ‘취미가’, ‘space xx’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상업화랑’은 기획자, 작가 양성과 더불어 미술이 지닌 상업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만든 이름으로서 자본주의시대 미술의 가치를 직시한다. ‘소쇼룸’은 그 이름이 내포한 ‘쇼룸’의 전시장 형태로 인테리어 가구, 소품 등과 초대 작가의 작업을 매치해 화이트 큐브가 아닌 실제 삶의 공간에 어우러진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전시가 변경될 때마다 작업에 맞게 변화하는 인테리어가 관객에게 개인 소장품으로서의 미술품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소쇼룸×김수연 ‘식물생활’, 설치 전경, 2017.

‘취미가’는 2층에서의 기획전과 함께 1층에서는 편집숍 형태로 작품 판매 창구를 운영한다. 이곳은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일부 작품을 판매한다. 공간 운영자 중 한 명인 권순우 기획자는 “중저가 작품 판매를 통해 관객이 미술품을 사적으로 향유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며 ‘취미가’의 설립 취지와 목표를 밝혔다. 이곳도 서울문화재단과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기금을 조달받고 있었다. 그는 “물론 기금으로 인해 전시가 유지되고 운영될 수 있는 것은 감사한 현실이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작가들의 생계에도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다”며 판매를 통한 수입이 결국 자신들의 목표를 장기적으로 실현하게 해주는 원동력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내비쳤다.

취미가, ‘취미관’ 설치 전경, 2017. 사진: 홍철기

영리를 추구함에도 이들의 태도는 기존의 상업 갤러리와 완전 다른 결을 갖는다. 그 이유는 수입 활동의 이유가 최대한의 수익 창출이 아닌 지속적, 자주적 공간 운영과 작가의 생계 보장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 있다. 화랑은 작가와 갤러리가 5:5 혹은 6:4로 작품가를 나눈다. 즉 판매 수입의 절반가량을 갤러리가 수수료로 갖게 되는 것이다. ‘산수문화’의 운영자 김지평은 전시된 작품은 판매가 가능하다면서도 수익률 배분에 관해서는 생각해볼 일이라는 고민을 내비쳤다. ‘기고자’ 또한 “작품 구매 문의 및 실제 구매는 언제나 환영이지만, 주된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방문객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판매 수익금이 100% 온전히 해당 작가에게 갈 수 있도록 커미션 피를 받지 않고 있다.”며 기존 갤러리의 시스템과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오랫동안 전시 공간의 목적을 구분하던 영리 ̄비영리의 벽이 말랑해지고 대안이 괄호 쳐 사라진 이 ‘공간’을 무엇이라 부를지 학계조차 아직 답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3기 대안공간이라 부르기도 하며, 평론가 고동연은 ‘자기 조직화’의 경우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반복된 정체성 선언 요구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동류를 묶는 특정 용어 정의에 관한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여기에 대해 ‘아마도 예술공간’ 책임 큐레이터 김성우는 이런 답변을 남겼다.

“우리가 반드시 그 안의 어딘가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여러 이슈를 파악하고 스스로 그것을 예술의 언어로 조직하여 의미와 질문을 파생하고자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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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 예림(미술 칼럼니스트)
사진 각 전시 공간 제공
출처
47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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