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가 만든 풍경

금빛 태양과 부유하는 물고기, 기둥 형상으로 선 땅과 텅 빈 시계.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가 삼청동에 창조한 ‘earthing’이라는 제목의 시적 세상, 21세기인들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가 선사하는 감동의 원천을 찾아서.

뉴욕의 작업실에서 우고 론디노네를 만났다. 검은 올리브나무와 또 다른 대표작인 하늘 페인팅 등이 보인다.

전시 준비 차 방문한 우고 론디노네의 스튜디오 직원이 “우고 론디노네는 꿈에서 본 걸 작품으로 현실화한다”고 귀띔했다. 그가 매일 어떤 꿈을 꾸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이 말은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데 꽤 쓸 만한 단서가 된다. 태양을 형상화한 거대한 금빛 원형 조각, 흙으로 뒤덮인 기둥 사이를 부유하는 52마리의 물고기를 보고 있자면, ‘솔라스탈지아(Solastalgia,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가 만든 신조어로 주변 지역 환경의 대대적 변화로 인한 우울감 및 괴로움을 의미)’의 미술적 표현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의견보다는 차라리 작가의 꿈속 풍경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더 설득력 있겠다 싶다. 우고 론디노네는 자연에 영감받는 대표적인 현대미술가지만, 그에게는 인류세를 가속시킨 인간을 비판하거나 선동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그가 창조한 이 오묘한 세상 속 자연은 단순히 인간이 보호 혹은 복원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기억해야 하는 본질적 속성에 더 가깝다.

 

 

1887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인 할렘의 오래된 교회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튜디오’로 변모했다.

태양

삼청동 국제갤러리에 황금빛 태양 ‘the sun’이 떴다. 지난 2015년, 층고 6미터의 이 공간에 인간 형상을 한 다섯 개의 돌 조각이 서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다시금 화이트 큐브가 자연의 논리가 개입된 새 토양과 공기로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the sun’은 2년 전 ‘태양왕’ 루이 14세의 욕망이 일군 기하학적 베르사유 정원을 끌어안았던 그것과 같지만, 지금은 삼청동 풍경을 품는다는 점에서 다르기도 하다. 작가가 수집한 나뭇가지를 철사로 고정, 청동으로 캐스팅한 후 도금 처리하는 등 모종의 미적 변형을 거친 태양은 그 자체로 인공과 자연의 근본적인 대비를 은유한다. 신화적 존재로서의 숭고함과 일상적 존재로서의 현실성, 그 간극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태양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대비와 역설의 에너지 아래에서 말이다. 전시가 끝난 후에는 또 어딘가로 장소를 옮겨 그곳의 풍경을 비출테니, 자연과 예술, 덧없음과 영원함, 어두움과 빛 등의 이중성으로 직조된 그의 작품은 한 차원 더 진화된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고 부르짖은 예술가들은 한둘이 아니지만, 우고 론디노네의 태양은 밤이 되어도 지지 않는다. 매일 뜨는 그들의 태양이 ‘연속성의 강력한 희망적 증거’라면, 론디노네의 지지 않는 태양은 희망 혹은 절망의 문제를 떠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본질 같은 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태양은 시간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절대성과 영원성의 상징이었다. 반면 어느덧 무의식 중에 ‘Timeless’는 ‘현재로부터 가장 먼 시점’으로 인식되고, 절대 닿을 수 없는 ‘영원’이라는 시공간은 이 길의 맨 끝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러므로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에서 ‘Timeless’의 면모가 느껴진다면, 말 그대로 ‘시간의 개념이 없는’에 가깝다. 인간계에서 자유로운 시공간, 고대의 현재적 형상이기도, 현대의 고대적 버전이기도 한 초월적 세계. ‘the sun’은 단순히 태양의 외형을 딴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고리에 속해 있음을, 시간이란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함을 인식하게 한다.

 

우고 론디노네는 세계적 현대미술가인 동시에 컬렉터이자 전시기획자로도 명성이 높다.

나는 일기를 쓰듯 살아 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태양, 구름, 비, 나무, 동물, 계절, 하루, 바람, 흙, 물, 풀잎 소리, 바람 소리, 고요함 모두.”

이 같은 메시지를 전한 우고 론디노네는 지난 30여 년 동안 자연의 요소를 차용하여 원시적이고도 시적인 시공간으로 안내해왔다. 그가 자연의 상징을 활용해온 방식은 대중적일뿐더러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실제 록 밴드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의 리드 싱어 플로렌스 웰치는 한 건물 외벽에 설치된(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에도 내걸린) 론디노네의 무지개 작품 ‘DOG DAYS ARE OVER’를 매일 보며 영감받았고, 동명의 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개의 날들’이 사전적 의미처럼 매우 더운 날인지, 혹은 힘든 날인지, ‘개의 날들’이 가고 ‘말의 날들’이 온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열린 해석의 주제가 되고 있다.

‘the sun’ 주변을 느리게 거닐다 보면 흥미로운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태양의 원형 안으로 마당 뒤편의 올리브나무가 쏙 들어오는 지점이다. 4년 전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 있던 흰색 올리브나무에 작가가 붙인 제목은 ‘Spring Moon’. 해와 달이 일직선으로 놓였다고도, 해가 달을 품었다고 볼 수 있는 형국은 낮과 밤이 뒤섞인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시간대로 나를 안내한다. 독일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론디노네의 작품이 선사하는 최고의 순간인 셈이다. 18~19세기에 태동한 낭만주의는 산업혁명 시대를 거쳐 이후에도 급격한 도시화와 합리성에 대항하는 사조로 통한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일몰, 별, 구름, 빛, 돌, 나무, 무지개 등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연적 요소에 심취했고, 이로써 인간의 감정과 꿈 같은 가치를 지켜내고자 했다. 우고 론디노네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의 후계자’라 칭한다.

갤러리 담장 너머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위용 가득한 금빛 태양이 만약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면, 이는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문명을 과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숙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론디노네에게 자연은 인간 경험이 깊이 관여하는 소재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이 놓인 곳에서는 인간 내면을 구성하는 ‘심적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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