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특급 전시

올 하반기 파리 최고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10월 3일부터 내년 2월까지 그랑 팔레에서 열리는 호안 미로의 회고전이다. 1974년 마지막 회고전이 열린 후 44년 만에 돌아온 호안 미로의 전시에 파리는 말 그대로 ‘컴백 미로’를 외치고 있다. 미로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무려 150여 점이 출품되는 기념비적인 전시를 무대에 올린 책임 큐레이터 장 루이 프라(Jean-Louis-Prat)에게 이번 전시의 의미를 물었다.

‘Bleu II’를 작업 중인 호안 미로.

사진 Mir / Adagp, Paris 2018, Photo : Successi Mir Archive

1974년 이후 처음으로 미로 회고전이 다시 열린 2018년 지금, 왜 미로인가?
1893년에 태어나 1983년에 죽은 호안 미로는 20세기 미술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피카소와 동시대 아티스트인 그는 조각이나 세라믹, 회화에서 독보적인 접근 방법을 펼쳤다. 큐비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어떤 유파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색채적이고 시적인 그만의 세계를 발명한 것이다. 이번 회고전은 미술사학자들에게 독보적이라 평가받은 그의 미술사에서의 위치를 대중에게 알리는 전시이기도 하다.

2010년에 독일 프리더 부르다 뮤지엄(Museum Frieder Burda)에서 미로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그 전시와 이번 전시의 공통점이 있나? 이번 그랑 팔레에서의 회고전의 특징은 무엇인가?
프리더 부르다 뮤지엄에서의 전시는 1960~70년대를 시작으로 192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획했다. 그 과정을 통해 미로의 초현실주의 시들을 조명하는 결과가 있었고, 시간을 거슬러 미로를 발견하는 전시였다. 반면 이번 그랑 팔레 회고전은 프리더 부르다 뮤지엄과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미로의 작품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의 작품을 그룹으로 묶어 시기별로 소개한다. 포비즘, 큐비즘, 디테일리스트, 초현실주의로 전시의 문을 연다. 그리고 1930년 미로의 작품에 큰 단절이 된 전쟁이 벌어진다. 전시관의 마지막 전시장들은 미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 25년간의 시기를 보여준다. 이 두 전시를 통해 미로가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가인지를 조명하고자 했다.

‘Femme, oiseau, étoile’(Woman, bird and star) (파블로 피카소 오마주), 245×170cm, oil on canvas

‘L’Espoir du condamné à mort II’(The Hope of the Sentenced to Death II), 267×351cm, acrylic on canvas

사진/ Espagne, Madrid,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1988,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 Photographic Archives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Espagne, Barcelone, Fundació Joan Miró,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e / Jaume Blassi

왜 두 전시 모두 연대기적인 서술 흐름으로 기획했나? 미로의 작품 사이에 어떤 연대기적 연관성이 있나?
교육적인 이유에서이기도 하지만 그랑 팔레의 공간 구조상 연대기적인 전시를 구성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미로의 세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번 전시가 미로의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기적인 성격을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미로는 자신이 태어난 카탈루냐와 작품 세계를 펼쳤던 파리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졌다. 그는 “파리와 농촌,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원히 떠날 수 없는 두 장소가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리라는 빛의 도시는 미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거기서 젊은 미로는 자신이 잘 모르던 포비즘과 큐비즘을 발견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2차 세계대전까지 당대 지성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가는 것을 꿈꾸게 된다. 그는 세잔에서 비롯되어 큐비즘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 유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미로는 카탈루냐 출신의 카탈란이 아니라 인터내셔널한 카탈란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그로 하여금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가게 했을 것이다.

‘Maquette de l’Arc à la Fondation Maeght VIII’ (Model of the Arc at the Maeght VIII Foundation), 1963,53× 57×22cm, Ceramic.

스페인의 섬 마요르카의 거리를 걷고있는 호안미로,1930.

사진/ France, Saint-Paul, Fondation Marguerite et Aimé Maeght,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Claude Germain – Archives Fondation Maeght, Espagne, Palma de Majorque,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Successió Miró Archive

미로는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이나 작가와 교류가 많은 아티스트였다. 이러한 교류가 미로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미로는 시를 좋아했다. 1921년 파리에 두 번째로 체류하던 시기에 미로는 조각가인 파블로 가르갈로가 빌려준 45번지 불로메 가 아파트에서 머물게 된다. 처음에는 단기임대로 머물렀다가 결국 1922년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바로 그 아파트에서 미로는 이웃이었던 화가  앙드레 마송의 소개로 시인, 작가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 미셸 레리스, 조르주 바타유, 앙토냉 아르토, 로베르 두아노, 트리스탄 차라, 레이몽 크노,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그리고 막스 자코브가 그들이다. 미로는 그들과 우정을 나누며 그들의 가치관과 관점을 공유했다. 1920년대부터 미로의 작품에서는 사인, 축약이나 함축적인 단어들이 나타난다.이런 테크닉은 화면에 무의식적이고 몽환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이는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와 시인, 작가 친구들의 작품을 결합하는 시도로 나아갔다. 1928년부터 그는 리즈 허츠의 작품인 <그것은 파이프였다>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를 시작으로 트리스탄 차라의 <여행자들의 나무>, 폴 엘뤼아르의 <모든 증거들>, 자크 프레베의아도니드> 등의 커버와 내지 일러스트를 맡았다. 판화와 리토그래피를 합쳐 258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문학을 위해 헌정한 것이다. 동시에 시인과 작가들은 미로의 작품을 위해 텍스트를 쓰면서 이러한 교류는 예술적 협업으로 발전했다.

1947년 미로의 미국 여행은 여러모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미로 스스로도 “가슴에 일격을 맞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미국 문화와 미로의 작품 사이에 실질적인 연관성이 있나?
1967년 미로가 미국을 방문했을때 그는 미국 아티스트들의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발견한다. 특히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와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아티스트들은 미로보다 훨씬 젊었지만  미로 스스로도 “이 젊은 아티스트 세대는 나에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한계 너머로 달려가는 자유를 보여주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나에게도 자유를 선사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미로가 느낀 이 자유는 그의 생애 후반 작품을 지배하게 된다.

1945년대부터 미로는 미국에서 인기 작가로 등극한다. 유럽에서도 인정받았지만 유독 미국에서 대환영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미로의 미국 첫 전시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1941년에 열린 회고전이다. 전시를 큐레이팅했던 제임스 존슨 스위니는 미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미로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전시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평론가, 미술사학자, 컬렉터들이 미로를  20세기의 미술 거장으로 인정한 계기가 됐다. 특히 미로만의 조형 언어와 시적인 에너지는 미국 화단과 대중을 사로잡았다. 또한 전시를 관람했던 마크 로스코, 로버트 마더웰, 잭슨 폴록, 빌럼 데 구닝, 바넷 뉴먼 등의 추상표현주의 사조에 속하는 미국 아티스트들은 미로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45년에는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 주관으로 1944년부터 제작된 작품인 세라믹과 리토그래피 등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또한 처음으로 대표작인 ‘Constellation’ 시리즈를 선보인 자리였다. 사실 미로의 작품을 볼때마다 우리는 모든 작품이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미로의 작품은 대중적인 화제를 모으며 인기를 누리는 것 같다.

‘Peinture-poème’ «Une étoile caresse le sein d’une négresse »(Painting-poem «A star caresses the breast of a Negress»), 1938, 130×195cm, oil and hand inscription on canvas.

호안 미로의 자화상, 1919, 73×60cm, oil on canvas.

‘Le Carnaval d’Arlequin’(The Harlequin’s Carnival), 1924-1925, 66×93cm, oil on canvas.

사진/ Royaume-Uni, Londres, Tate, acquisition 1983,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Successió Miró Archive. France, Paris, Musée national Picasso-Paris, donation héritiers Picasso 1973/1978,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Rmn-Grand Palais (musée national Picasso-Paris) / Mathieu Rabeau. États-Unis, Buffalo, Collection Albright-Knox Art Gallery, Room of Contemporary Art Fund,1940,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2018, Photo : Albrigth-Knox Art Gallery, Buffalo / Brenda Bieger and Tom Loonan.

당신은 미로의 친구이기도 했다. 미로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미로와의 일화 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게 있다면?
생폴 드 방스에 있는 매그 재단 미술관에서 미로를 만났던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장 루이 프라는 1969년부터 2004년까지 매그 재단 미술관의 디렉터였다.) 미술관에서 미로를 처음 본 날 그는 정원에 조각과 세라믹 작품을 설치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미로의 빛나는 시선과 그의 넉넉한 여유에 크게 감명받았다. 그 뒤로 미로가 세상을 떠난 1983년 12월 25일까지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서커스를 같이 보러 다녔다. 미로는 서커스 아티스트들을 좋아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즉흥적인 순간의 예술에 대해 미로는 늘 경외감을 느꼈고 그 경외감은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난 오늘날의 관람객들이 이러한 미로의 꿈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에게 그 꿈은 희망을 나누는 것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기쁨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번 같은 대규모 회고전은 통상 국제적인 박물관이나 중요한 컬렉터들의 도움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어떤 박물관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나? 전체 작품에서 개인 컬렉션에서 비롯된 작품은 어느 정도 되나?
맞다. 이런 전시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주요 박물관의 협조, 개인 컬렉터들과의 협력은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미로의 작품처럼 가격이 높고 미술사적으로 유명한 데다 손상의 위험이 큰 작품들을 대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던 데다 특히 미로의 후손들이 보여준 전폭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필라 파운데이션, 마조르크의 호안 미로 팔마 파운데이션,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파운데이션은 현재 미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단체이다. 매그 재단 미술관을 비롯한 미로 파운데이션에서 작품을 대여하지 못했다면 이 전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퐁피두 센터나 피카소 박물관, 스톡홀롬의 모던 아트 박물관, 에센의 폴크왕 박물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 등 미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손꼽히는 유럽의 박물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생 루이 아트 뮤지움, 내셔널 갤러리, 알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 필라델피아 뮤지엄 등 미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의 박물관에서도 작품을 대여할 수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전체 전시 작품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개인 컬렉터들의 소장품이다. 개인 컬렉터를 설득해 전시를 위해 대여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회고전이라 해도 미로의 작품을 대여해주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결정임을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박물관과 개인 컬렉터들 덕분에 미로의 천재적인 작품을 대여할 수 있었으며, 그게 이 전시의 가장 놀라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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