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의 심연 속으로

영화 '7년의 밤'은 한 남자가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목숨을 바쳐서 지켜낸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을 모르는 심연 속으로 배우 류승룡이 또 한번 잠잠하게 걸어 들어간다. 고통받는 인간, 고뇌하는 얼굴, 감내하는 인생. 류승룡의 제스처와 눈빛이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손목에 찬 시계는 Cartier, 안경은 Oliver Peoples,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 촬영장에 입고 온 개량한복처럼 통이 넓은 바지가 굉장히 특이합니다.(웃음)

팬들은 싫어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바지예요. 이런 바지만 열 벌 정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날씨가 추워서 오늘은 겨울용 바지를 입고 왔어요.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에 촬영이나 여행으로 지방에 내려가면 산속 깊은 곳까지 올라가봅니다. 평소에 술, 담배를 안 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스스로를 풀어줄 수 있는 방법으로 등산이나 트레킹을 자주 다녀요. 시나리오를 집중해서 읽어야 할 일이 생기면 강원도 양양에 있는 오색 주전골에 자주 내려갑니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 <7년의 밤>은 언제 어떤 공간에서 처음 읽으셨나요?

소설이 출간되던 해에 저는 영화 <최종병기 활>을 촬영하고 있었어요. 그때가 2011년도 즘이니까 정말 오래됐네요. 지방에 촬영하러 내려갔다가 잠깐 시간이 났을 때 읽기 시작했어요. 손에 쥔 상태로 내려놓지 못하고 한 호흡으로 쭉 읽어 내려갔어요. 그 다음 챕터가 너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었죠. 책을 완전히 덮었을 때 복잡하고 묵직한 감정들이 올라오더군요. 보이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우발적인 사고, 아이의 죽음, 잘못된 선택, 그리고 복수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큰 뼈대에서 ‘최현수’는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살인자가 되어버리는 인물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수척해진 현장 속 모습들을 보면서 이 영화를 두고 “감정의 혹사이자 블록버스터”라고 표현하신 이유를 짐작했어요.

매 장면마다 탈진하고 탈수될 정도로 엄청난 열량을 소비했어요. 감독님이 원했던 건 압력이 어마어마한 밥솥의 작은 구멍 사이로 수증기가 미세하게 치고 나오는 그런 밀도 있는 절제된 연기였는데, (한숨) 그게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추창민 감독님이 집요하고도 섬세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제가 갖고 있는 역량 이상의 것을 집어내셨어요. 그분이 가진 고요한 집중력, 지구력, 뜨거움이 정말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영화 안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 결의 눈빛과 눈물을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 것 자체가 저에게는 영광이자 두려움이었고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어디에서 누구랑 어떤 장면을 찍었는지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11월부터 찍기 시작해서 그해 겨울이 굉장히 추웠는데 다들 극중 인물이 가진 고통에 집중하느라 추위가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수트, 셔츠, 타이는 모두 Tailorable, 구두는 S.T. Dupont, 한스 브라트루드(Hans Brattrud) 스칸디아 라운지 체어는 by Kollekt 제품.

소설 맨 앞장에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상상 속 세령마을 조감도가 그려져 있죠. 사건이 벌어지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배경이 가지고 있는 힘이 큰데요. 영화 미술 제작팀에서도 10개월간 전국의 수목원과 저수지를 돌아다니며 숨은 장소를 많이 찾아냈다고 들었습니다.

상관저수지라는 곳은 원래 평상시에는 철조망으로 굳게 닫혀 있는 출입금지 구역이에요. 거기 들어가보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날카로운 침엽수림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는데 쭈뼛쭈뼛한 그 나무들이 잠자는 호수를 꼭 찌르는 것만 같은 공포감을 주더군요. 현수가 상관저수지에 있는 집에 도착해서 하늘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자연이 주는 공포감들이 굉장히 와닿았어요. 그리고 촬영했던 장소 중에 원남저수지는 걸어 들어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라 배우와 스태프들이 보트 한 대를 타고 출퇴근을 했었어요. 심지어 화장실도 없을 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라 캐노피를 쳐놓고 서로 ‘에헴’ 하고 인기척을 내면서 드넓은 강물을 바라보며 화장실도 해결했고요. 원시적인,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촬영장에 있으면 ‘아, 이런 데서 그런 일이 일어났겠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죠. 휴대폰도 잘 안 터질 만큼 모든 것들이 단절되어 있었고 항상 물안개가 낮게 피어오르던 환경들이 온전히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을 줬던 것 같아요.

데뷔 이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연기 변신을 시도한 배우 장동건 씨가 최현수를 파멸시키는 오영제 역으로 등장합니다. 영화 제작보고회에서 류승룡 배우와 연기하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촬영 전날 각자 숙소에서 한숨도 못 자고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그 긴장감을 촬영장에 고스란히 갖고 와서 연기했어요.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의 에너지를 계속해서 밟고 쌓아 올려가며 연기했던 것 같습니다. 장동건 배우가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표현했는데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 감정을 서로가 느꼈을 때 배우로서 가장 기분이 좋아요. 고경표 배우는 극 중에서 7년 동안 못 봤던 아들로 등장하는데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분장도 다른 장소에서 했었어요. 현수와 아들 서원이가 서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실제로도 저희가 제대로 처음 만난 셈인 거죠. 둘 다 머리를 빡빡 밀고 서로 바라보는데 그날 경표가 나를 보자마자 격하게 울더군요. 둘이 만났을 때 느껴지는 어떤 처연함이 있거든요. 모든 장면들이 밀도 높은 감정 신이었기 때문에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조용히 말을 아끼고 각자의 신이 끝나면 “아이고 수고 많았다!” 이 정도의 위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제스처였어요. 알고 보면 그것이 최고의 배려였던 것 같아요.

수트는 SIEG, 시계는 IWC, 안경은 Oliver Peoples 제품.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이 3월부터 크랭크인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나요?

그동안 선택했던 작품들을 보면 잔혹동화였던 <손님>, 판소리를 다룬 <도리화가>, 실험적인 발상의 <염력>처럼 어떤 기발함, 아이디어, 엉뚱함을 가진 시나리오에 제일 끌립니다. 사실 <극한직업>의 경우 소재만 놓고 봤을 때는 마약, 조직폭력배, 형사들이 등장하지만 건강한 웃음, 통쾌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코미디 요소가 더 강해요. 함께 출연하게 될 배우들 간의 탄탄한 팀 플레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동안 출연했던 작품을 아드님이 모두 챙겨 보는 편인가요?

최근 작품 가운데서는 아마 제가 더빙으로 참여했던 <서울역> 빼고는 모두 봤을 겁니다. 대사에 욕설이 좀 있어서 보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봤을 수도 있겠죠.(웃음) 사실 그런 점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선택하기 때문에 너무 표현 수위가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것에는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디언즈>, <캡틴 하록>, <리오 2>와 같은 애니메이션에 더빙 작업으로 참여했는데, 목소리만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주는 또 다른 해방감이 있나요?

(갑자기 성우 톤으로) 평상시에 제가 “얘들아~” 이러면서 과장스럽게 말하면 이상하잖아요.(웃음) 실사 영화에서 목소리를 변조하면 자연스럽지가 않죠.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거기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라 더빙 작업도 재미있어요. 개인적으로 자연, 사회, 휴먼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일 좋아해요. 정보를 전달하는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어떤 감정적인 부분도 전달할 수 있는 역할을 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생각합니다.

류승룡 배우를 떠올리면 ‘수염’이 자동 연상되는 것 같습니다. 8년 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서 수트 차림에 행커치프를 꽂고 말끔하게 그루밍한 모습으로 등장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멋스럽게 자란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처럼 느껴져요.

몸도 그렇고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맡은 배역에 따라 디자인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수염은 언제든 깎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기르고 있는 수염도 아마 <극한직업> 촬영이 시작되면 없애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면도를 하면 발가벗은 것처럼 스스로도 이상하긴 해요.(웃음) 아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재킷과 니트는 모두 Tailorable 제품.

트렌치코트는 Bottega Veneta, 팬츠는 Polo Ralph Lauren, 부츠는 Loake,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체중 감량을 하려고 요즘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고 들었어요. 부성애를 표현해야 하는 <손님>이나 <염력>같은 영화에서는 푸근한 아버지의 모습을 위해 10kg 넘게 살을 찌우고 반대로 <표적> 같은 본격적인 액션물에서는 140일 동안 운동해서 45년 만에 복근을 처음 만들어보셨죠?

그때 만든 복근은 딱 14일 동안만 몸에 붙어 있었어요.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 토끼 간 같은 거죠. (“배우에게 체중 감량이란 헤어 커트와도 같은 것”이란 어록을 남겼지만 힘들지 않으세요?)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서 술, 담배도 끊은 사람인데요. 탄수화물 조절 정도쯤이야.(웃음) 체중 조절은 작품 들어갈 때마다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제는 몸이 언제 탄수화물을 원하는지 언제 염분을 달라고 말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 순간을 즐기면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더군요. 아, 그런데 커피는 정말 못 끊겠어요.

최근에 부쩍 좋아지는 무언가가 있나요?

섬에 자주 가요. 2년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섬이 주는 어떤 이국적인 정서가 있어요. 육지에서는 절대 못 느끼는 고립감이랄까. 외딴 섬 안에 갇혀 있으면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껴요.

‘직업으로서의 배우’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정의 내리기 어려운 질문인데, 세월을 그려내고 시대를 담아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그때 그때 읽어내는 사람. 저는 배우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배우의 감정을 통해 사람들이 해갈하고 에너지를 전달받는 그런 역할 말이죠.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마성의 카사노바 장성기와 같은 진한 멜로 드라마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 이제 멜로물을 하게 되면 ‘실버 러브’가 아닐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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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Park Yongbin
헤어 이 일중
메이크업 김 부성
스타일리스트 김 세준
세트 스타일링 한 송이
어시스턴트 김 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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