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와 김주원의 움직임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영화 <라빠르망>이 연극 <라빠르트망>으로 돌아온다. 연출가 고선웅이 만든 ‘내가 사랑할 때,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김주원과 오지호는 엇갈리는 사랑을 한다.

오지호가 착용한 터틀넥 니트는 Circolo 1901 by Coevo, 팬츠는 Imz 제품. 김주원이 착용한 드레스는 Haider Ackermann 제품.

근래 고선웅이 선보인 작품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라는 수식어에 어울렸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매회 기립박수를 받으며 ‘동양의 햄릿’으로 자리매김했고,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뮤지컬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5·18의 가슴 아픈 기억을 웃음 섞인 비장함으로 연출한 <푸르른 날에>는 ‘그때’가 되면 매번 무대에 올려진다. 그런 그가 선보이는 신작은 뜻밖에도 <라빠르트망>이다.

“2년 전인가 우연히 영화 <라빠르망>을 보게 됐는데 연극으로 만들면 굉장히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무대에 뒤얽힌 감정으로 묶인 네 남녀가 동시에 등장한다면 ‘아파트’라는 제목의 의미를 확연한 이미지로 구현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말고는 사랑 얘기를 본격적으로 한 적이 없어요. 올해 오십 살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사랑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죠.”

고선웅은 수소문 끝에 원작자 겸 감독인 질 미무니를 파리에서 직접 만나 무대화를 위한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이걸 연극으로 만든다고?” 반문했던 미무니도 당시 파리에서 공연된 고선웅의 연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보고는 걱정보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고선웅에겐 영화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앙상블을 보여준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역할을 누가 맡을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드레스는 Dior, 사이하이 부츠는 Salvatore Ferragamo 제품.

“영화에서 ‘리자’(모니카 벨루치) 역은 그 자체로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잖아요. 그걸 춤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연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2007년과 2017년 ‘노래 없는 뮤지컬’ <컨택트>에서 노란 드레스의 여자로 등장해 ‘몸의 언어’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었던 김주원은 고선웅의 부름에 “인생 계획에 없던” 연극을 하게 됐다.

언제나 즐기는 과정이 중요할 뿐이에요. 춤을 출 때도 이 포즈에서 저 포즈로 가는 중간 과정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냐에 따라 다음 포즈도 더 완성도 있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원래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춤극으로 함께 만들어보자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주원, 최승희 하기 전에 연극 하자.’ ‘제가 하면 개그가 될 수 있는데….’ ‘어, 알았어!’ 그러곤 그냥 하기로 되었네요.(웃음)” 한국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20년 동안 무대에 서온 김주원은 발레 이외에도 다양한 무대 예술에 도전해왔다. “제가 아직 철이 안 들었나 봐요. ‘도전’이라고 표현하시니까 내가 도전을 했었나? 싶어요. 저는 결과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즐기는 과정이 중요할 뿐이죠. 춤을 출 때도 이 포즈에서 저 포즈로 가는 중간 과정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냐에 따라 다음 포즈도 더 완성도 있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게다가 고선웅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연출가 중 하나다.

“대부분의 작품을 봤을 거예요. <아리랑>에서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생각나요. 어두운 창고 같은 데서 모두 엎드린 채로 반주 없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정말 오열할 뻔했어요. 그 시점에 그렇게 ‘아리랑’을 넣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아, 이게 고선웅표구나.’ 했죠.”

움직임을 탁월하게 활용하는 고선웅 스타일에 대한 믿음은 첫 연극에 임하는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연출 님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극단 마방진의 작품을 볼 때마다 연극배우들이 춤추는 사람들만큼 몸을 잘 쓴다고 생각했어요. 연출 님이 원래 동적인 걸 좋아하고 실제로도 춤을 잘 추시더군요. 연습하다가 ‘여기서는 김주원이 이렇게 움직였음 좋겠어!’ 하면서 춤을 추는데 잘 추셔서 깜짝 놀랐어요.(웃음)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라빠르트망>에 나온 모든 배우들이 살짝씩 움직임을 보여줄 것 같아요.”

발레건 뮤지컬이건 김주원의 무대를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하는 연기는 어떨지 물음표가 떠오르기도 한다.

터틀넥 니트, 하이웨이스트 팬츠는 모두 Salvatore Ferragamo, 하이힐은 Dior 제품.

“저는 몸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니까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있었어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반년 정도 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하지만 연극 무대는 두려워요. 첫 연습에 갈 때 뭘 준비해 갈까 물었더니 그냥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나쁜 버릇이 생기는 것보다는 백지 상태가 났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연극에서의 말하기를 한창 배우는 중인데 그동안 배우들이 그냥 말을 한 게 아니구나 싶어요. 저는 그저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는 것처럼 가르쳐주시는 걸 계속 연습할 뿐이에요.”

하지만 이에 대해 고선웅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지호 씨도 주원 씨도 이미 막스와 리자의 자아가 들어온 상태예요. 자아가 중요하지 발성이나 발음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니트와 데님 팬츠는 Polo Ralph Lauren 제품.

사랑의 환영과 진실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 ‘막스’(뱅상 카셀) 역에는 오지호가 캐스팅돼 첫 연극 무대에 데뷔한다.

“살다 보니 열정, 욕망이 본질인 사랑도 있고, 인생의 동반자와 나누는 평화로운 사랑도 있고, 사랑은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빛깔로 변하더라고요. 그걸 엇갈린 네 남녀를 통해 보여주는 게 <라빠르망>이라는 멋진 영화였어요. 마흔이 되고 인생에 대해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좋은 멜로를 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터틀넥 니트는 IMZ 제품.

터틀넥 니트는 IMZ 제품.

그러나 작품에 대한 애정과 확신과는 별개로 첫 연극 무대에 서는 두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오지호는 오늘도 대학로에 있는 연습실로 출근했다.

“우리 연극이 올라갈 무대를 한번 보러갔는데 덜컥 겁이 났어요. 이 깊고 매력적인 러브스토리를 저기 앉아 있는 저 많은 관객에게 내가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무섭더라고요.”

드라마와 영화에선 카메라가 자신을 좇지만 무대에선 광활하게만 느껴지는 시공간을 오롯이 무대 위의 배우가 책임져야 한다.

“이전에는 눈빛으로 대중과 소통했다면 이번엔 온몸으로 내 감정을 표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어렵다면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제약 없이, 더 자유롭게 관객과 만나는 거니까 배우로서는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해봐야죠.”

드라마 <환상의 커플>, <내조의 여왕> 등에서 보았던 장난기 밴 눈웃음을 지으며 촬영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던 오지호는 겉으로 봤을 때는 전혀 긴장된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온 정신이 <라빠르트망>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데 집중돼 있다. 막스가 세 여자와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랑 속에서 헤맨다면 오지호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 속을 유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전에는 눈빛으로 대중과 소통했다면 이번 <라빠르트망>에서는 온몸으로 내 감정을 표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든 드라마든 좀 더 고민하면 좀 더 깊은 연기가 나오게 돼 있더라고요. 연극이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깊이 받아들여 온전히 이 작품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라빠르트망>에서 얽혀 있는 관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알리스’ 역에는 영화 <더 킹>에서 칼칼한 경상도 사투리로 느물느물한 권력 비리형 검사들을 향해 칼끝을 겨눴던 김소진이 출연한다. <더 킹>으로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조연상을 수상한 후에 단 한 번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던 그녀를 오지호는 이렇게 소개한다. “영화에서 알리스는 리자와는 또 다른 오묘한 매력을 보여주잖아요. 연출 님이 얘기한 이 작품의 주제인 ‘내가 사랑할 때,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쩌면 알리스죠.”

김주원이 착용한 메탈릭 소재 블라우스는 Michael Kors Collection 제품. 오지호가 착용한 송치 소재의 수트와 스카프는 모두 Kimseoryong Homme 제품.

김주원이 착용한 벌룬 소매 드레스는 YCH, 귀고리와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지호가 착용한 실크 로브는 Kimseoryong Homme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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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Kim Dowon
헤어강 현진(김주원), 임 정아(오지호)
메이크업최 시노(김주원), 배 재석(오지호)
스타일리스트안 정희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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