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의 비밀의 숲

빅 픽처의 설계자, 외로운 다크 히어로, 끊임없이 고뇌하는 연약한 개인. 밀림처럼 우거진 비밀의 숲에서 우리는 이창준을, 그리고 배우 유재명을 발견했다.

유재명, 비밀의 숲 - 하퍼스 바자

수트, 셔츠는 모두 Kimseoryong 제품.

수염이 있는 이창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낯설게 느껴져요. 지금 사극을 촬영하고 있어서, 수염이 좀 길었죠? 이번 영화 <명당>에서도 조승우 씨와 함께 출연하게 됐어요.

‘창준시목’의 케미를 이어나가는 것인가요? <비밀의 숲>에서 창준이 특검팀으 로 발령 난 시목을 찾아와서 넥타이를 고쳐 매주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기억 나요. 이번에는 조승우 씨와 친구이자 조력자, 동지 같은 관계로 나와요. 개인적으로 원래도 배우 조승우의 팬이었는데, <비밀의 숲>을 함께하면서 정말 매 력적인 배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집중력, 분석력, 현장에서의 에너지, 동료들에 대한 배려심. 네, 굉장히 멋집니다. 배우 조승우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이번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어요.

<비밀의 숲>의 배우들은 드라마 밖에서도 참 돈독해 보여요. 지금까지도 단체 카톡방에서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농담들이 오가요. 작품은 진지했지만 멤버들은 참 순박하고 진솔하고 유쾌해요. 두나 씨도 되게 재미있고, 성근이 형도, 규형이도 즐거운 사람들이에요. 저는 ‘노잼’까지는 아닌데, 성격이 좀 차분한 편이어서 분위기 메이커는 못 돼요.

며칠 전 <비밀의 숲> 팀의 계곡 MT 사진을 봤어요. 백숙에 수박까지, 제대로 피서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고기도 먹고, 물놀이도 하고, 족구도 하고 그랬어요. 술자리에서 “우리 계곡이라도 가서 놀자”는 말이 나와서 번개처럼 이루어진 자리였어요.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다 모이긴 힘들지만 앞으로 더 바빠지면 못 볼 것 같아서. 작품이 잘된 걸 떠나서 멤버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되게 많아요. 그래서 계속 아쉬운 거죠. 정말 좀 색다른 경험이에요. 저도 이렇게 작품을 마치고 배우들끼리 따로 만난 경험이 많지는 않거든요. 어쩌면 작품 때문인지도 몰라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우리가 과연 이 섬세한 작품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배우들 사이에 있었어요. 작가님의 언어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동료들에 대한 배려심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얼마나 연기하기 어려운 작품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를 응원하게 된 것이죠.

유재명, 비밀의 숲 - 하퍼스 바자

패턴 셔츠는 Batonkwonohsoo, 코트, 팬츠, 슈즈는 모두 Bottega Veneta 제품.

동료애까지 불러일으킨 대본의 힘이 놀라워요. 배우들이 받은 대본에 범죄 현 장의 신발장 높이까지 치밀하게 적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특별히 놀라웠던 디테일이 있나요? 매 순간, 매 장면마다 놀라웠어요. 저는 거대 서사로부터는 최 대한 자유롭고자 했어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드라마 전체에서 어떤 역할 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그것은 작가님의 몫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디테일에 집중하는 것이었어요. 이 작품은 디테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돼요.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밀림같이 우거진 진실과 거짓의 숲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저도 연극 무대를 위한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있고 대본을 보는 것이 직업인데, 보고 나서 계속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5부를 촬영하다가 2부 대사를 다시 확인하는 식이었죠. 첫 리딩 때 작가님을 뵙고 나서는 한 번도 이창준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왜냐 하면 대본의 언어에 모든 디테일과 의중이 다 녹아 있었거든요. 모든 신이 섬세하다고 느꼈어요. 좋지 않았던 장면이 없었죠. 이창준의 신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나왔던 옥상 신과 동재와 함께 등장하는 첫 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대본을 받고 나서 촬영을 하기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 동 안 기다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요. 내가 준비한 톤이 맞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첫 신의 첫 대사를 할 때는 많이 긴장 했어요. 시목과 대화 하는 신들도 다 기억이 나요. 연재와의 신은 대본상에 많이 포진되어 있진 않았어요. 상징적이고 짧게 묘사되어 있었죠.

<비밀의 숲>에서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면 밥을 끝까지 먹는 황시목, 그리고 마음껏 사랑하는 창준과 연재일 거예요. 그런데 창준은 사실 로맨티스트죠. 창준과 연재의 러브스토리를 좀 더 보고 싶어하는 ‘비숲’ 팬들이 많아요. 아마 연재와 함께하는 장면이 더 많았다면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생략과 압축이 적절했죠. 연재와의 신 같은 경우에는 제가 만들어 낸 디테일들이 몇 개 있어요. 함께 공항에 갈 때 “배 안 고파? 아무것도 안 먹었 잖아?” 하는 대사도 원래는 없었어요. 죽음을 직감한 인물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마지막 장면인데 그냥 떠나 보내는 것이 좀 아쉬워서 감독님께 이 대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손을 잡는 것도 대본에 없었는데 살짝 손을 내밀기도 하고.

이창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드라마에서는 보여지지 않았지만 대본에는 적혀 있었던 전사가 있었나요? 제가 상상한 전사는 있었어요. 이창준은 가난 하지만 정직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열심히 공부를 했죠. 사법고시에 붙어 검사가 됐을 때는 집안 전체가 영광스럽게 생각했고요. 그때만 해도 본인은 끝까지 정의로운 검사로 남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연재라는 여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재벌가의 사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랐을 것이고요. 처음에 나온 트리트먼트에 창준은 ‘회색빛의 남자’라고 표현되어 있었어요.

회색빛의 남자를 표현하기 위해서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나요? 예전에 연극을 할 때 연출하는 형에게 “너무 뜨겁지 않게 연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었어요. 이를테면 사막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보여달라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미학적인 연기의 지름길인 것 같아요. 배우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과하고 뜨거운 연기를 할 때가 있는데, 과연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뜨거울까요? 이를테면 실연을 하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에 모두가 울고 소리치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외로움은 항상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결국 다 외롭다는 전제 안에서 다양한 디테일들이 나오는 거죠. <비밀의 숲>의 이창준이 가진 오묘한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서 낯선 연기들을 시도했던 과거의 경험을 활용했어요.

이수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에게 있어 감정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매우 결정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있기에 욕심도 이기심도 생기는 걸 보면, 오히려 요즘 사회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어요. 이 말에 매우 동의해요. <비밀의 숲>에서도 감정이 돌출 되지 않는 인물일수록 정상적으로 보여요. 이번에는 특히 어떤 감정의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이창준은 계속해서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주변 인물에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 인물이었으니까요. 그전에는 감정을 많이 써야 하는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했어요. 전작 영화 <하루>에서만 해도 아이가 죽는 걸 매일 매일 반복해서 봐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감정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현대인들의 감정이 사라졌다기보다는 눌려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지나가는 타인에게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꺼리게 되는, 위협이 많은 환경이니까요.

유재명, 비밀의 숲 - 하퍼스 바자

패턴 수트, 셔츠, 스카프는 모두 Kimseoryong 제품.

황시목이라는 이름의 뜻이 ‘시초가 되는 나무’인데, 사건의 시초이자 모든 것을 떠안고 자살한 이창준이 곧 ‘시목’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어요. 이창준이 그리는 빅 픽처를 알게 된 시점은 언제인가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14부를 촬영할 무렵까지 범인이 누군지 몰랐어요. 감은 있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 았죠.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인물을 연기해야 했으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도움이 됐어요. 엔딩을 모르고 어떻게 연기를 하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창준이 원래 그런 인물인 거죠. 이창준이 마지막에 한 선택이 일찌감치 설계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창준 역시 계속해서 갈등하는 인물이었죠.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불거지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거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계했다면 완벽한 괴물이겠지만, 이창준도 사람인지라 그의 고뇌를 연기에 넣는 것이 중요했어요.

<비밀의 숲>을 보는 내내 단체 카톡방에서 드라마에 대한 촘촘한 수다를 이어 나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마지막 회는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서 봤는데, 결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어요. 이창준의 죽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 는 사람이 있는 반면 허망하다는 사람도 있었죠. 이창준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체제를 고발한 다크 히어로이지만 이 드라마는 이창준을 영웅시하는 것을 경계해요. 황시목의 입으로 이창준을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분명히 선을 긋 죠. 본인이 생각하는 이창준은 의인인가요, 괴물인가요? 그가 의인인지, 괴물 인지에 대한 생각은 시청자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이창준이 미화되는 것은 싫었어요. 극 중에도 “철저히 재벌의 사위로서 개처럼 살다 간 인간한테서 빼앗은 증거여야 한다. 그래야만 증거로서 공신력이 생긴다”는 대사가 나오잖아요.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돌을 하나 던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창준의 착각일 수 있고요. 다만 저는 이창준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르는 자는 사실 고통스럽지 않죠.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서 썩어빠진 것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해야 하는 이창준은 가슴으로 외로움을 느끼죠. 서사적으로는 빅 픽처의 설계자이지만, 이창준도 양심과 부끄러움, 외로움을 느끼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어요. 어찌 됐든 배우로서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엔딩을 장식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행복한 일이에요.

수트를 입기 시작한 것도 몇 년 안 됐어요. 그전에는 수트가 딱 한 벌 있었어요.여전히 넥타이도 잘 못 매는데 역설적으로 수트가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사는 게 재미있는 거죠

황시목처럼 ‘혼밥’이 익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혼자 밥 먹는 걸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어요. 단독자와 집단 안에 있는 것이 편안한 사람의 차이겠죠. 어느 쪽에 가까우신가요? 저는 왔다갔다해요. 혼자 술 먹는 거 좋아하고, 혼자 밥도 잘 먹고, 혼자 있는 걸 되게 좋아해요. 그만큼 사람들을 만나서 술 먹고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해요. 그런데 여자친구에게 가끔 혼자 있고 싶다는 청을 할 때가 있어요. 고쳐야 하는 습관인가 싶기도 한데,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꿈을 꾸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그런 시간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에요. 배우는 강박증의 결과물인 것 같기도 해요. 어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집착을 해야 하니까요. 일로서는 재미있지만 자연인 유재명으로서는 힘든 것이기도 하죠. 굉장히 밀도 높은 정신 노동이니까요. 작업을 한 후에 드는 공허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가는 거죠.

이창준은 자신의 동굴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듣는데, 유재명 씨가 즐겨 듣는 음악은 뭔가요? 저는 김광석, 전인권, 뭐 이쪽 라인이에요. 술을 먹을 때도 한대수부터 시작하고, 7080이죠.(웃음) 아는 가사가 제일 좋고, 듣던 음악이 제일 편해요.

동굴 안에서는 주로 뭘 하세요? 한 번씩 청소를 해요. 흐트러져 있던 모든 물건 들을 제자리를 두고 쓸고 닦는데 오래 할 때는 세 시간도 걸려요.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좋아하는 술집에 가서 한잔 마시고, 메모를 하기도 하고요. 가만히 있다가 문득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라고 느낄 때, 항상 같은 자리에 있 었던 사물이 갑자기 낯설어 보일 때, 알싸한 쓸쓸함이 느껴질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순간적으로 쓱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느끼며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유재명, 비밀의 숲 - 하퍼스 바자

수트, 셔츠는 모두 Chang Kwanghyo Caruso 제품.

과거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시간을 두고 “음식으로 치면 진수성찬은 아니고,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한두 사람이 나눠 먹는 느낌”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하셨죠. 그런데 <비밀의 숲>으로 인해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지금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성찬을 즐기는 분위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가 되어서 이렇게 이슈가 된 작품을 만난 것이 두 번째예요. <응답하라 1988>을 할 때 한 번 경험을 해봐서인지 지금은 덤덤해요. ‘새로운 유재명의 발견’ 같은 기사도 봤고 예전에 비해 인지도도 높아졌지만 이것을 계기로 승승장구할 거라는 생각은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강박, 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이 있어요. 즐기면서 풀어야 연기를 더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리고,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야 연기가 잘 되더라고요. 그렇게 어떤 배우가 될 것이냐,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질문들에 대해서 내가 느릿하게 내린 답들을 하나씩 실행 하려고 하죠.

그 답이 뭔가요? 남들 사는 것처럼 살기 싫은 것 같아요. 이를테면 처음에 운전을 잘 못할 때는 당연히 차 욕심이 없잖아요. 근데 일을 하면서 약간 돈이 생기다 보니까 어느 날 제 2백만원짜리 중고차가 후져 보이는 거예요. 예전에는 멋지게만 보였는데 말이죠. 여전히 운전을 잘 못하고 차도 잘 안 타는데, 자꾸 차를 바꿔야 될 것 같은 강박이 생겨요.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마음을 경계하려고 해요. 옛날에 연극을 할 때 입었던 추리닝들이 제가 가진 옷의 대부분인데, 주위에서 계속 옷 좀 사라고 해요. 그러면 사야 되겠다 싶다가도 바로 포기해요. 뭐하러 그러나 싶은 거죠.

하지만 이번 드라마를 통해서 ‘수트 창준’, ‘피지컬 천재’로 거듭나셨어요.(웃음) 사실 수트를 입기 시작한 것이 2~3년밖에 안 됐어요. 그전에는 수트가 딱 한 벌 있었어요. 형이 결혼할 때 형수님이 선물해준 그 옷으로 단편영화를 한 30편 찍었어요. 여전히 넥타이도 잘 못 매는데 역설적으로 수트가 잘 어울린다고 하 니까, 사는 게 재미있는 거죠. 모든 것은 분장과 조명과 이야기의 힘이고, 저는 그냥 동네 아저씨인데.(웃음)

큰 키와 긴 다리, 수트가 잘 어울리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으시잖아요. 목소리도 참 듣기 좋아요. 그동안에는 실제 나이보다 연령대가 높은 캐릭터 들을 주로 연기하셨는데, 그에 대한 억울함은 없으셨나요? <비밀의 숲>이 사랑을 받으며 단편영화 <우리 아빠 환갑 잔치>가 재상영되었는데, 팬들 사이에서 ‘환갑이 된 창준은 볼 수가 없다’고 원성이 자자했어요.(웃음) 제가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 보이니까, 기가 막힌 약을 먹어서 젊어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죠.(웃 음) 지금보다는 좀 더 관리를 해야겠지만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은 좋지 않지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내 삶의 시계만 잘 지키고 살아도 행복한데 다른 사람들의 삶의 시계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전제예요. 내 삶은 좀 비워져 있어야 어떤 자극이 왔을 때 배우라는 직업으로 바로 반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이 사는 모습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돈이 주는 즐거움이 뭔지도 알고 최근에는 과소비도 좀 했지만….(웃음)

유재명, 비밀의 숲 - 하퍼스 바자

터틀넥, 슈즈는 모두 Hugo Boss, 와이드 팬츠는 Kimseoryong 제품.

주로 어떤 항목에 돈을 쓰시나요? 뭐, 술값이죠. 근데 술을 사면서 잔소리가 더 많아졌어요. 최근에도 후배들에게 술을 사면서 “그게 아니라니까”라고 잔소리 한 뒤에 이것이 꼰대의 길이 아닌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누리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고 여행도 좀 가고 그래야 되는데 젬병인 부분이 많아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서 지방 촬영을 다니면서 휴게소에 가면 있는 여행 안내지를 이만큼 모아놓았는데 막상 시간이 나면 ‘아, 뭐 의미 있어?’ 하면서 잘 안가요. 되게 이율배반적인 삶이에요. 피곤한 스타일일 수 있죠. 적당히 살아도 되는데 계속해서 뭘 자꾸 반성하고, 계속해서 뭘 메모하고…. 그런데 그 강박과 모순이 저라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정의라고 하면 거대 담론처럼 느껴지지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매 순 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일재가 “내 가족의 안전이 정의”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밀의 숲> 속 인물들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잖아요. 유재명 씨의 정의는 뭔가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행동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내가 하는 행동이 비겁한 행동인지 부끄 러운 행동인지 생각하게 되잖아요. 불교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걸 인지해야 가능한 것이죠. 자본주의 하에서 한 사람의 자연인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결국 자기가 선택한 삶을 성실 히 살아가고 주변 사람들을 아끼고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할 수 있는, 그런 보편 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밀의 숲>에서 한여진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들처럼 말이죠. 저는 그게 가장 소박하면서도 적극적인 정의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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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Ahn Jisup
헤어심 해림
메이크업배 지희
스타일리스트임 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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