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보낸 시간

드라마 <비밀의 숲>과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이준혁이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드라마로 찾아온다. 실제로 만난 이준혁에게 이 캐릭터들의 전사는 없다. 다만 그동안 그가 접해온 문화적 흔적들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를 왕성한 문화소비자라고 말하는 그와의 대화는 릴케의 시와 하퍼 리의 소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새로운 영화로 이어졌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 다른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사용한 그는 이제 자신의 스토리를 이어나가야 할 시간인 것 같다고 말한다.

셔츠와 재킷은 모두 Ordinary People 제품.

<비밀의 숲>에서 특히 좋아한 캐릭터가 둘 있었다. 서동재 캐릭터와 강원철 검사장. 그런데 실제로 만나본 인상은 뺀질뺀질하고 느끼한 동재와는 외모부터 많이 다르다.(웃음)

사실 동재와는 정반대다.(웃음) 그리고 동재 캐릭터는 나이도 40대였다. 동재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살을 찌우려고 노력했고 머리도 최대한 느끼하게, 눈썹도 진하게 했는데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살을 좀 뺐다.

곧 방영을 앞두고 있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개인적으로 궁금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와 코미디가 공존하는 드라마라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막돼먹은 영애씨>의 명수현 작가, 한상재 PD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이 작품의 어떤 점에 끌렸나?

시나리오가 매우 유쾌하다. 나 역시 배우이기에 앞서 매우 왕성한 문화소비자이기 때문에 <비밀의 숲>도 그렇고 <신과 함께-죄와 벌>도 그렇고 그때 그때 내가 보고 싶은 작품들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내가 나온 작품들을 밤에 보면 참 무섭고 무겁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쁜 얘기 하면서 미래에 대한 좋은 상상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TV를 보다가 잠들어도 되고, 가볍게 무언가를 먹으면서 볼 수도 있는 작품 말이다. 드라마는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소외되기 쉬운데 모든 인물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병원 드라마인데 주인공이 의사가 아니라 물리치료사, 방사선사, 실습생 등의 스태프라는 점도 신선하다.

이번 드라마에서 물리치료사 역할을 맡았는데, 캐릭터 정보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 ‘감성이 씨가 마른 감정극빈자’. 드라이한 캐릭터지만 <비밀의 숲>의 시목이만큼은 아니다.(웃음) 오히려 그 드라이함이 허무한 개그로 받아들여져 살짝 웃길 수도 있는 캐릭터다. 아, 생뚱맞지만 ‘슬링 치료’는 한번쯤 받아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리치료의 일종인데, 작품을 준비하면서 받아봤더니 정말 좋더라. 몸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자세나 움직임을 뇌에 익숙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뇌 치료를 하는 건데, 그 원리가 마음에 들더라. 그동안 다리를 꼰 자세가 편했다면 뇌한테 다시 다른 자세를 재교육시켜주는 거다. 무언가를 무턱대고 좋다고 추천하는 편이 아닌데, 이건 추천할 수 있다.(웃음) 필라테스랑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금 꼭 물리치료사같다.(웃음) 드라마에서 시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궁금하다. 시를 좋아하나?

열심히 살고 싶을 때는 <슬램덩크> 같은 만화책이 좋다. 그들은 열심히 하는 거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시는 꾸준히 봐온 건 아닌데 개인적으로도 뭔가 많이 힘들었을 때 어떤 시를 읽으니 감정을 돌릴 수 있더라. 그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인생’이었다.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웃음)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릴케의 말에 동의한다. 시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니까.

터틀넥은 Ermenegildo Zegna 제품.

코트는 Ermenegildo Zegna, 니트는 Neil Barrett, 팬츠는 Woo Young Mi, 슈즈는 Ordinary People 제품.

배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직업 아닌가?

그렇긴 하다. 인간을 좀 더 이해하게 되는 건 분명히 있다. 이를 테면 예전에 <수상한 삼형제>를 했을 때 ‘이렇게 오글거리는 멘트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좋아하는 분들이 있더라. 치졸하고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재 캐릭터도 공감받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사랑해주는 분들이 있었고.

<비밀의 숲>과 <신과 함께-죄와 벌>, 두 편의 작품에서 연기한 악역은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 못난, 허약한, 모자란 악역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사랑받은 케이스였던 것 같다.

관객으로서 작품을 볼 때도 그런 캐릭터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인간답게 느껴져서.

스스로 왕성한 문화소비자라고 말했는데, 어떤 걸 좋아하나?

책, 음악, 영화 등 다 좋아하는데 어릴 때부터 계속 많이 봐왔기 때문에 영화가 가장 큰 것 같다. 영화는 정말 가리지 않는다. 편향되게 뭐가 더 좋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때의 시기에 보고 싶은 걸 본다. 최근에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를 재미있게 봤다. 어떤 것을 긁어내고 압박하는 날 선 영화도 물론 좋아하지만, 요즘 문득 드는 생각은 그래도 좀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는 사회가 잘 돌아갔을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이고, <셰이프 오브 워터>는 사랑 앞에서 용기를 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에 대해서 꿈을 꾸게 해주는 영화이지 않나. 한국에서도 이런 작품들이 좀 더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적인 경험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나?

사실 그게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문화를 소비하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 유행이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는 돈 거 같아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반복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친구들과 “뭐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이가 들수록 좋아할 수 있는 게 적어지는데, 그건 취향이 좁아지는 게 아니라 취향이 확고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영화 앱 왓챠에서 혼자 영화 별점을 매기기도 하는데, 벌써 2천 편 가까이 됐더라. 앱에 2천 편의 작품을 본 동안의 시간이 나오는데, 새삼 놀랐다. 영화만 본 것이 아니라 만화도 봤고 책도 봤고 음악도 들었고 게임도 했으니까, 전반적으로 삶의 시간을 남의 얘기를 듣는 데 많이 썼구나 싶었다.(웃음) 이제는 내가 어떤 얘기를 해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시기다. 내 삶을 적극적으로 살면서 나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셔츠는 Woo Young Mi 제품.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끝나고 나면 <너도 인간이니>라는 새로운 작품이 곧장 이어진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로봇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SF인 거지. 원래 SF를 좋아하고 기술 발전에 관심이 많다. 얼리어댑터적인 성향도 있고. 영화로 치면 <그녀>나 <블레이드 러너>, <컨택트>처럼 인문학의 시선에서 접근하는 SF물을 좋아한다. 기술이 발전해서 AI가 실생활에 도입됐을 때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바뀔까, 어떤 철학이 새롭게 필요해질까, 이런 게 되게 궁금하다. 문득 할머니를 보면서 집에 전화가 없던 시대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다 겪은 사람 기분은 어떨까, 생각하기도 하고.(웃음)

배우 최강희와 함께 출연한 단막극 <한여름의 추억>을 좋아했다. 20대에는 반짝반짝했던 여자가 어느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너무 슬펐다. 주위의 30대 여자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웃음) 당신의 30대는 어떤가?

그런 점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지 않을까? 옛날보다 더 좋다고 생각되는 건 별로 없다.

셔츠, 재킷, 팬츠, 신발은 모두 Ordinary People 제품.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친구들이랑 행복이 뭔지 얘기한 적이 있다. 일적인 부분에서 행복하다는 걸 뭘까 생각하다가, ‘참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게 아닐까 싶더라.”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이 연이어 잘되고 있는 요즘은 ‘다행이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많아지지 않았나?

항상 불안감이 있다. 그나마 조금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에는 사실 여기 있는 매니저도 포함된다. 일적인 부분에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는 동료이고 내가 뭔가 잘됐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이다. 삶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삶의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니까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기도 하고. 보물섬을 찾아가는데 한 배를 탔으니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 거지. 이건 ‘뻘소리’인데, 집이란 게 결국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이 집을 점점 넓히려고 하는 게 결국 자신이 편할 수 있는 공간을 점점 넓히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거다.(웃음)

배우 이준혁이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넓어지는 거 같나?

아직까지는 ‘넓어졌다’기보다는 좀 더 ‘확보했다’는 느낌에 가깝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너무 행복하다’는 순간들은 많이 없다. 근데 바꿔서 생각해보면 소소하고 예쁜 추억들이 항상 있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내일의 대본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현장에서의 추억들은 다시 보면 되게 예쁘고. 그런 식의 느낌인 것 같다. 분명하게 ‘행복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오늘도 나름대로 좋았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좋구나, 그 정도가 아닐까?

돈이 많으면 뭘 사고 싶나?

딱 하나다. 시간을 사고 싶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영화 한 편 속 편하게 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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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Park Jongha
출처
4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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