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살아 있는 배우, 정연주

이 배우의 가는 길을 좇았더니 희한한 이야기, 문제적 ‘웹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났다. 다만 자유롭게 살아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정연주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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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았는데 마침 감독과 배우들의 무대인사가 있는 날이었다. 온 동네를 휘저으며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는 ‘옥분’(나문희)과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만나는 구청의 직원 ‘아영’으로 출연한다. 당신 차례가 됐는데 “저 어려 보이죠?”라고 인사를 해서 의아했다.

영화에서 아영이 민재를 처음 만나 그러잖나. “저 어려 보이죠? 어린 나이에 일찍 합격해서 그래요.” 그 대사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거다. 많이들 기억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웃더라.(웃음)

나도 그때는 아영의 대사였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러닝 타임 내내 아영의 주옥 같은 대사가 한둘이 아니었어서.(웃음) 애드리브는 없었나?

대본에 쓰인 그대로 연기했다. 처음 대본을 받아 읽어보는데 아영은 확고한 자신만의 논리로 상대방의 마음까지 읽는다고 생각하는 캐릭터였다. 민재는 관심도 없는데 “저 소개팅 해요, 말아요?”라고 묻는 아영을 연기하려면 그녀가 가진 논리에 나도 일말의 의심이 없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들이 설득되는 정도도 달라지니까. 자칫 잘못하면 잘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어물쩍하면 안 되는 역할이었다.

대본을 읽으면서 이 장면은 관객들이 웃지 않을 수 없겠다 하는 대사들이었을 텐데, 그런 중요한 순간을 연기할 때, 코미디 연기의 ‘맛’을 느꼈나?

이 부분이 웃기다는 생각을 하고 연기를 하는 것과 그런 생각 없이 했는데 재미있게 봐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빵 터지는’ 포인트를 알고 하는 게 더 어렵다. 그 대사, 그 장면의 의도를 잘 살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그래서인지 나중에 그 장면을 볼 때 고민의 흔적들이 내겐 보였다. “저 어려 보이죠?”도 그렇고.

웹드라마의 대세였던 작품이자 웃기는 걸로 치자면 포복절도급인 <대세는 백합>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나?

있었다. 그래서 예전 작품을 보기가 힘들다. 저기서는 좀 더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고민의 흔적으로 인한 망설임을 두 작품 모두에서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엔 완벽하게 자기만의 우주를 가진 여자들이었다.(웃음)

아 그런가? 그러면 그 정도 선이 맞는 건가?(웃음)

연기에는 답이 없으니까 어느 정도의 적당한 선, 디테일에 대해 같은 배우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 있나?

한예종 연극원에 같이 다니는 동기들한테 물어보기도 하는데 촬영을 할 때는 현장에서 상대방에게 의지하는 편이다. 확실히 많이 얘기하고 부딪히고 맞춰보면 그 과정에서 마음이 열려서 연기할 때도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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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를 촬영할 때는 어땠나?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그렇게 느꼈겠지만 나문희 선생님의 존재감이 진심으로 큰 힘이 됐다. 같이 연기해보면 알 거다. 나는 할 게 없다. 그냥 선생님 얼굴 보고 선생님이 주시는 거 받으면 된다. 한 현장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말로 설명하려니 한계가 느껴지는데 존경심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도깨비>의 염혜란이 연기한 진주댁, <연애담>의 이상희가 연기한 족발집 처녀, <더 킹>의 김소진이 연기한 활동가 금주 선생, <우리들>의 최수아가 연기한 어린 옥분 그리고 아영까지.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여자들 각각의 인생사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김현석 감독님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우리 영화는 무엇보다도 여자 배우들이 정말 최고야. ‘어벤저스’가 부럽지 않아.(웃음) 관객들이 구체적으로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그려냈다고 봐주셨다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씨네21>에 실린 김현석 감독의 제작기를 봤는데 1월에 시나리오를 받아서 3월 말에 첫 미팅이 있었고 봄과 여름 동안 촬영을 하고 9월 초에 기술 시사를 했다. 적기에 ‘납품’ 했다고 글을 맺었는데(웃음), 2~3년 전 촬영한 영화를 뒤늦게서 개봉하는 일이 잦은 요즘, 촬영 현장에서의 기억이 생생한 상태에서 영화가 개봉한 건 행운에 속하는 일 같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1월부터 3월까지의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빼고 나면 정말 한 6개월 만에 촬영하고 개봉한 거니까.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굉장히 안정적으로 영화를 꾸려주셨다. 게다가 촬영도 공무원 역할에 맞게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구청에 가서 했다. 나의 첫 상업영화가 정석대로 나온 것도, 의미 있는 기획에서 탄생한 특별한 이야기라는 것도 정말이지 행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 뚝 끊긴 이야기도 있다. 백합(여성 간 연애)이라는 생소하고도 센세이셔널한 장르를 차용한 문제적 드라마 <대세는 백합>은 큰 인기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시점에 ‘스톱’되고 말았다. 너무 아쉽다.

그러니까 말이다. 좀 이어갔으면 좋겠는데, 한다고 하면서 감독님이 자꾸 다른 걸 만드신다.(웃음)

가죽 재킷과 원피스는 모두 Dew E Dew E, 부츠는 Longchamp 제품.

그냥 하는 거다. 몸을 바삐 움직이고 머리를 비워 그 순간에 충실히, 그저 재미있게 하는 거다.

윤성호 감독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감독님의 진짜 팬이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정말 좋아했다. 그 작품에 나왔던 배우들, 대사, 이야기의 흐름 모든 게 좋았다. <우리들>을 만든 윤가은 감독님의 초기 단편영화인 <손님>에 출연해 상상마당에서 상영을 했는데 그때 윤성호 감독님과 만나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정연주는 <손님>으로 ‘단편영화제의 칸’으로 불리는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오늘영화> 중 21분짜리 단편 <백역사>에서 윤성호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추고 <대세는 백합>을 함께 했는데 좋아하는 취향의 연출자와 촬영하면서 기대가 있었을 것 같다.

애초에 큰 기대를 갖고 있진 않았다.(웃음) 감독님의 작품이 정말 웃기지 않나, 그래서 찍을 때도 재밌을까 하는 궁금증은 있었는데 촬영 때는 그렇게 웃기지 않더라. 대신 편집돼서 나오면 너무 재밌다. 감독님 작품은 신기한 게 촬영하면서 배우들끼리 굉장히 돈독해진다.

감독님이 촬영할 때 예민하거나 화를 내서 뭉치게 되는 거 아닌가?(웃음)

화를 좀 내시긴 하는데 그래서 그런 건가? 그럼 일부러 그러시는 걸까?(웃음) 아무튼 <대세는 백합> 찍을 때 배우들과 세세한 장면들도 따로 맞춰보고 돈독하게 작업했다.

또다른 웹드라마 <내일부터 우리는>도 함께 했는데 만드는 입장에서 웹드라마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냥 드라마보다는 규모가 작다는 데서 오는 이점들이 있다. ‘웹’이 안 붙는 드라마를 한번 해봤는데 그때는 규모가 실로 컸다. 제작발표회도 호텔에서 하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붓한 웹드라마를 촬영할 때 서로 좀 더 많은 소통을 하면서 충분한 이해 속에서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인 부터 웹드라마, 단편영화와 장편영화, 정극 연기를 하는 드라마까지 그 누구보다 다양한 영상 매체를 섭렵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 다 똑같다. 다만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천천히 서로 의견 주고받으면서 찍는 것도 있고 정해진 계획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도 있고 난리통 속에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도 있고.(웃음) 그러고 보면 장르나 캐릭터보다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무톤 재킷은 Yves Salomon, 톱은 Recto, 팬츠는 Nohant 제품.

요즘 마지막 학기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다고 하던데, 오늘도 수업 듣고 오는 길인가?

지금은 입시 기간이라 학교가 쉬고 있다.

스웨트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라 버스 타고 학교 다녀온 줄 알았다.

이 차림 그대로 대중교통으로 학교에 다니긴 한다. 가끔 알아보는 분도 있긴 한데 특별히 힘들게 하는 분은 없다. 모두가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날 피곤하게 하는 분은 없다.(웃음)

뮤지컬 배우를 지망해서 춤과 노래를 배우다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영화를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걸 그룹 제안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나?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내가 안 잡은 건가. 아직 늦지 않지 않았을까?(웃음) 춤추는 게 너무 좋아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이니 연극이나 뮤지컬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춤이다 보니 배우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지 않다는 점이 좋다.

정연주라는 배우를 좇다 보니 별별 특이한 이야기를 만나게 됐다. 특히 <대세는 백합>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기념비적인 캐릭터였고, 앞서 언급했던 모든 작품과 <선암여고 탐정단><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도 정말 평범하지가 않았다.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웃음)

어떤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대본을 읽고 내 나름의 납득이 되면 한다.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선택한 작품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나한테 좋은 거겠지? 사실 요즘 개인적으로는 내적 갈등이 심하다. 연기하는 일의 무게가 느껴진다고 할까? 나는 작품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 직업인으로서 연기를 할 때에는 내 취향과 무관한 작품도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그럼에도 보는 이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내 마음가짐이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다. 모든 배우가 한번쯤 겪는, 고민이 많은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

프로페셔널이라는 건 원치 않은 선택을 한 후에도 그 일에 대해 일정 정도의 성과를 내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하는 게 숙제일 거다.

좋은 방법이 있긴 하다. 그냥 하는 거다. 몸을 바삐 움직이고 머리를 비워 그 순간에 충실히, 그저 재미있게 하는 거다. 내가 바라는 건 심플하다. 자유롭게 살아 있는 배우.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선 언제든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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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Shin Chaeyoung
헤어김 민선
메이크업이 은경
스타일리스트박 만현, 이 민규
어시스턴트배 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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