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수를 주목해

어느 쪽으로나 그에겐 ‘표출해야 하는 세계’와 ‘살아내야 하는 세계’라는 숙제가 있다. 먹고사는 현실도 때때로 예술인 배우 하연수를 만났다.

니트 풀오버는 Grey Yang. 실버 피어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니트 풀오버는 Grey Yang, 메탈릭 실버 플리츠 스커트는 Recto, 실버 귀고리는 Beauton Jewelry, 레이스업 슈즈는 Reike Nen.

시스루 니트 원피스는 Cos, 화이트 팬츠는 Escada, 실버 귀고리는 Beauton Jewelry.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 니트 원피스는 모두 Cos, 화이트 팬츠는 Escada, 실버 귀고리는 Brill Piece, 가죽 뮬은 Reike Nen.

장미 떨기처럼 말간 얼굴을 하고 앉아서는 배우 하연수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저 하연수예요(하연수의 톤으로).’ 하면 되는데, 옛 시절의 대사니까 ‘홍장미예요~(그 시절 연기 톤으로)’ 하는 거 있잖아요. 홍장미라는 이름부터가 저한테 익숙지 않으니…. 짧은 치마를 단속한다든지 난데없이 길거리에 사이렌이 울린다든지, 제가 연기한 장미의 모든 행동 반경은 그 시절 속에 들어 있는데 실제 제 피부로는 겪어보지 않은 것들이잖아요. 그걸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이번 영화를 딱 한 번 모니터 했는데, ‘과연 사람들이 내 연기를 자연스럽게 봐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니 조금은 무섭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미 영화가 나온 걸 어떡해.(웃음)”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엄마 ‘홍장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숨기고 싶었던 반전 과거가 소환당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코미디다. 녹즙기를 방문 판매하며 억척스러운 한국의 엄마로 사는 장미(유호정 분)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하연수가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줄거리를 읊는다. 흡사 몰입감 넘치는 한 편의 구연동화다.

“그래서 딸 현아는 엄마인 장미가 잡혀가기 직전 상황인지 꿈에도 모른 채 ‘엄마 안녕’, 하고 유학을 떠나요. 장미는 그렇게 감옥에 가요. 딸 현아가 쓰던 음악 노트가 있는데, 장미가 오선지 맨 뒷장에 편지를 써놓거든요. 나중에 현아가 그걸 발견하고 읽는 장면에서 유호정 선배님의 내레이션이 흘러요. 장미가 잡혀가는 순간보다도 저는 그때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밀도 있는 묘사를 따라 덩달아 미간을 들썩이다 보니 엄마가 생각났다. 당신은 시들어도 자식은 꽃피우고픈 엄마. 주책맞은 감상에 젖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했다.

“엄마 이야기잖아요, 이 영화는 사실. 물론 근본적으로 가족의 사랑을 말하죠, 코믹한 요소들을 가미해서. 시대극이라 할 만큼 확실한 배경적 요소도 있지만 주된 주제는 엄마예요. 엄마의 사랑, 엄마의 삶. 나의 엄마도 이랬을 것이다, 나의 엄마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 이게 저희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되게 무뚝뚝해요.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늘 엄마한테 효도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참 무뚝뚝한 편이에요. 전화도 자주 안 해요(웃음). 교통사고가 나도 전화 안 할 거예요. 걱정하시니까. 어릴 땐 엄마랑 많이 싸우기도 했어요. 중학교 다닐 무렵에 많이 싸웠고 고등학생 때도 종종 그랬던 것 같은데 사실 제가 좀 일찍 철이 들었어요.”

자세를 고치고 앉아 왜냐고 물었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그때부터 엄마랑 떨어져서 빨래하고 방청소도 알아서 해야 했어요. 사감님이 벌점을 매기는 제도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했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도 싫든 좋든 4인 1실에서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그때부터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 탐구하면서 어느새 철이 든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좀 어렵게 자랐거든요. 하루에 용돈으로 오백원을 받았어요. 예술중학교에 다녔는데, 레슨을 마치면 밤 열한 시예요. 중간에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오백원뿐이잖아요? 뒤돌면 배고픈 나이에 저녁으로 오백원짜리 빵을 사 먹었어요. 그 당시 부산에 ‘덮밥21번지’였나?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 거기에 가면 천구백원짜리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나요. 친구들은 노래방도 가고 이것저것 다 하면서 휴대폰도 있더라고요. 저도 외삼촌이 휴대폰을 하나 사줬는데, 나중에 돈이 없어서 해지했어요. 그런 형편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그녀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손수 그린 작품들을 보고 꽤나 동했던 터, 그림과 하연수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전공이니까. 사실 배우는 불안한 직업이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게 되는 역할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역할도 늘어나고요. 누군가 날 써주지 않으면, 찾아주지 않으면 항상 밥그릇 걱정을 해야 하니까. 사진을 찍을 때도 물론 진지하게 임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라고 생각해요. 오늘 저를 촬영해 주신 사진가처럼 이미 잘 찍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그림은 조금 달라요. 15년 가까운 시간 동안 틈틈이 그려오기도 했고, 나중에 나이 들면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그리고 있어요.”

현실밀착형 답변에 당황했다.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다시금 연기 외의 작품 활동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림만 그리는게 아니라 하연수는 사진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모 인터뷰에선 호되게 병을 앓았던 지난해를 회상하며 올해는 꼭 실비보험에 가입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그녀였다.

“그림도 계속 그리고 있고, 이것저것 하는 건 많아요. 저는 그냥 그런 스타일인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예술혼’을 불태우길 즐기긴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주의자죠. 제 주변에는 많이 벌지 못해도 그림을 그린다거나 예술을 하는 자체가 너무 좋아서 오롯이 거기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그런데 저는 영락없는 현실주의자예요.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니’ 스스로 되뇌는. 예술을 하는 시간만큼이나 돈 버는 것도 중요해요. 사실 무언가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것 만큼 저를 채워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친구도 좋지만 그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는 없거든요.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해요. 그럴 때 창작에 집중하면서 저를 치유하고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 하기. 사진과 그림, 여행 같은 것들이에요.”

예술적 현실주의자. 혹은 현실주의적 예술가. 어느쪽으로나 그에겐 ‘표출해야 하는 세계’와 ‘살아내야 하는 세계’라는 숙제가 있다. 먹고사는 현실도 때때로 예술인 배우 하연수에게 ‘그 다음’은 뭘까.

“인터뷰 질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도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예요. 아니, 사실 제 취미가 고민이에요. 거짓말이 아니라, 매일 고민해요. 오늘은 이렇게 했는데 앞으로는 어떡하지, 내일은 어쩌지, 올해는 이렇게 해서 괜찮을까? 이런 생각을 늘 해요. 일단은 미뤄왔던 운전면허를 따야 해요. 그리고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것.”

왜 수많은 하연수의 피사체는 ‘노인’인지 참 궁금했다. 끝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제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걸 다 보여주니까요. 그냥 그 사람 자체가 다 보이는 나이가 있잖아요. 손의 주름이라든지, 거짓 없는 미소, 꾸밈없는 표정. 깊은 응시. 그 모든 게 제가 가보지 못한 세계잖아요. 오랜 시간 미지의 세상을 살아온 그 분과 저 사이의 아무런 유대가 없다 해도, 그걸 렌즈에 담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한 매력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디고 데님 스트랩리스 드레스는 Cos, 실버 & 유리 소재의 귀고리는 Brill Piece.

새틴 드레스, 레이스 브라는 모두 Nina Ricci, 진주 장식 귀고리는 Recto, 스트랩 샌들은 Stuart Weitzman.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사진 곽 기곤
헤어 이 혜영
메이크업 문 지원
스타일리스트 주 가은
출처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