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으로 돌아온 유연석

배우 유연석이 뮤지컬 <헤드윅>의 헤로인으로 돌아왔다. 급진적인 변신을 거듭한 아름다운 배우가 부르는 대담하고 애틋한 노래가 곧 시작된다.

유연석, 헤드윅 - 하퍼스 바자

헤링본 코트, 보타이 디테일 셔츠, 팬츠는 모두 Bottega Veneta, 팔찌와 반지는 Caliphash, 목걸이는 Trencadism 제품.

유연석, 헤드윅 - 하퍼스 바자

시퀸 장식의 플랫폼 부츠는 Dsquared2 제품.

굵직한 직선과 근육으로 무장했던 한 남자가 화려한 색조와 풍성한 금발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베를린의 장벽만큼이나 단단한 무언 가가 무너져내렸다고 생각했다. ‘어깨깡패’의 대명사였던 그가 감춰져 있던 보드랍고 동글한 어깨를 45도 각도로 틀었을 때, 담백했던 눈매에 보라색 아이섀도를 그윽하게 그러데이션했을 때, 마침내 모든 것을 초연한 듯 고혹적인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할 때 마우스를 손에 쥔 채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이 포스터를 보지 못한 사람이 혹시 있다면 지금 검색창에 ‘유연석 헤드윅’이란 키워드를 입력해볼 것을 권한다. 함께 더블 캐스팅된 배우 오만석이 ‘빠져버릴까 봐’ 자세히 쳐다보지 못한다는 그 얼굴을 말이다.

올해 1월 종영한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이후로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한두 달 정도 고민에 빠졌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자꾸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헤드윅이 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고 있더라고요.(웃음) 친한 형이 ‘나한테 지금 똑같은 질문 세 번째 물어 보고 있어. 하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강렬한데 도대체 뭐가 겁나는 거냐, 그걸 잘 생각해보라’고 말하더라고요.” 조승우, 조정석, 윤도현, 변요한 등 숱한 배우들이 거쳐간 영예의 전당에 ‘유드윅’이란 이름이 오르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사실 유연석은 뮤지컬 <헤드윅>의 회전문 관객(같은 공연을 여러 차례 관람하는 사람)이었다. 원년 멤버들의 주요 공연을 매번 챙겨 봤고, 각 시즌별 소 극장 대극장 무대의 차이점을 객석에서 먼저 경험했다. “공연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흥에 겨워 객석에서 일어나 박수치고 춤추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어요.(웃음) 록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관객들과 주고받는 그 에너지가 너무 좋더 라고요. 제가 감히 그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당시엔 상상도 못했죠.”

유연석은 올여름을 <헤드윅>과 함께 났다. 해외에서 내한한 팀의 드래그 퀸 쇼를 틈틈이 찾아다니고 이태원의 클럽 ‘트랜스’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었다. 캐릭터의 목소리 톤을 잡는 과정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트랜스젠더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꾸기 가장 힘든 부분이 목소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가꾸는 것은 의학의 발달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목소리까지 여성스럽게 만들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이런저런 방법을 연구해봤는데 발성하는 포인트가 남성의 경우 조금 더 가슴을 울리면서 말을 한다면 여성은 코나 가슴 위 부분으로 호흡을 사용한 소리를 내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연습 해보니까 얇은 목소리도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게 들렸습니다. 주변에서 그 목 소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도 하고요.(웃음)”

유연석, 헤드윅 - 하퍼스 바자

롱 캐시미어 코트, 핀턱 디테일 화이트 셔츠, 팬츠는 모두 Burberry, 목걸이는 Trencadism,
페이턴트 부츠는 Saint Laurent 제품.

평소 본인 몸에 살집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포스터 촬영을 하면서 원피스를 입어봤더니 옆구리 살이 보이기 시작해서 샐러드로 식단 조절을 했다. 몸에 밀착되는 화려한 무대 의상을 피팅해보면서 팔뚝이 더 슬림해졌으면 해서 도리어 근력운동을 멀리했다. 며칠 전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고 했다. 옛날엔 툭 의자 등에 기대고 앉았다면 요즘은 가끔씩 몸을 앞으로 요염하게 기댄다며 그 동작을 시연해 보였다. 그 순간 조금 다른 뉘앙스로 심장이 ‘쿵쾅’했다. “아이고 습관이 참 무섭구나 느꼈어요.”(일동 웃음)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해서 ‘유연소’라는 별명을 얻은 ‘성실파’이지만 ‘NG’와 ‘테이크’가 용납되지 않는 무대 위에서 2시간가량의 스토리를 끌고 나가야 하는 뮤지컬은 만만치 않은 산이다. 첫 공연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안하고 초조해요. 무대 위에 올라갔는데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서 멍하게 서있는 그런 악몽을 가끔 꾸기도 해요.” 요즘의 베드타임 스토리는 대본이다. “불안해서 옆에 두고 잠드는 경우가 많죠. 갑자기 대본을 한번 보고 싶을 때가 있어서 식당에 갈 때도 꼭 손에 쥐고 갑니다. 밥 먹다가도 갑자기 보고 싶어질까 봐요.”

가죽 코트, 팬츠, 슬리브리스는 모두 Kimseoryong,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가장 최근에 본 영화 역시 <헤드윅>. 공교롭게도 얼마 전 이 영화는 재개봉되어 소리 없이 개봉 3주차에 3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 객석 안에 유연석도 있었다. “재개봉 소식을 듣자마자 맥주 마시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관에 혼자 다녀왔어요. 마지막에 헤드윅이 노래를 부르다가 ‘손을 들어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혼자서 조용히 손 들면서 영화를 즐겼어요.(웃음)” 유연석은 자신이 먼저 ‘모범 관객’이 되어 과정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요즘 드는 생각은 작품 하나를 만들어나가는 것 자체가 제 삶의 일부더라고요. 예전에는 고통스러울 만큼 치열하고 급하게 살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는 작업 자체가 즐겁지 않다면 굳이 제 삶의 일부를 포기해가면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작품을 해야 될지 더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밴드와의 합이 중요하다. “<헤드윅>은 뮤지컬이지만 밴드 멤버들과 한 편의 콘서트를 하는 느낌도 들어요. 그분들이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곧 배우이기도 합니다. 존재감만으로도 든든해요. 그래서 이번 공연은 특히 밴드와의 합이 재미있어요.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기다리기보다는 기분이 좋으면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다 가셔도 됩니다.(웃음)” 유연석이 뽑은 이번 공연의 명대사는 무엇일까? “헤드윅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림받는 장면은 연기하면서도 안타깝게 와 닿았죠. 그때 이런 대사가 있어요. ‘사랑은 창조 그 자체일 수도 있어.’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네 요.(웃음).”

유연석, 헤드윅 - 하퍼스 바자

가죽 재킷, 팬츠, 스트라이프 셔츠는 모두 Bottega Veneta, 목걸이는 Trencadism, 반지는 Caliphash, 슈즈는 Salvatore Ferragamo 제품.

유연석, 헤드윅 - 하퍼스 바자

프린트 재킷과 팬츠는 모두 Jil Sander, 셔츠와 스카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목걸이는
Bulletto, 팔찌는 Trencadism,
오른손 중지에 낀 반지는 Bulletto, 약지에 낀 반지는 Thomassabo 제품.

<헤드윅>은 뮤지컬이든 영화든 막이 내리면 그냥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마력의 콘텐츠다. 극장을 나오며 ‘The Origin Of Love’나 ‘Wig In A Box’와 같은 ‘그들 각자의 넘버’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택시를 황 급히 잡아타고 압구정의 전자신발 같은 음악 바에서 밤새 해갈하며 ‘떼창’을 부 르고 싶어진다. 유 배우가 직접 운영하는 이태원의 작은 와인 바로 향해보는 건 어떨까? 혹시라도 운이 좋은 날엔 공연 뒤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포착 할지도 모를 일이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다 그 지역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지 인들과 조금씩 나눠 마셨어요. 그러다 ‘포트 와인으로 이태원에 바를 한번 해 볼까?’ 농담처럼 던졌는데 그게 진짜 이루어져버렸네요.(웃음) 6층에 근사한 룸도 꾸며놓았는데 손님들은 주로 7층이나 8층 루프톱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비어 있는 6층을 주로 제가 지키고 있습니다.” 유연석의 빈 시공간은 주 로 무엇으로 채워질까? “저 나름의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방법은 여행 자주 다 니고 사진도 찍으면서 스스로가 힐링할 수 있는 취미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것 같아요. 뮤지컬을 하면서 이번에 일렉 기타를 사서 다시 연습하고 있어요. 요 즘 사진은 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많이 찍고요.” 가장 최근에 다녀온 여행 지는 도쿄다. “일본에서 팬미팅을 마치고 부모님과 여행을 하다가, 마지막엔 혼자서 도쿄에 좀 머물렀어요. 예전엔 스케줄을 알차게 짜서 굉장히 열심히 돌 아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즘엔 첫날 호텔만 예약하고 나머지 일정은 자유 롭고 즉흥적인 여행을 즐기는 타입으로 바뀌었어요.” 차곡차곡 쌓아온 취향의 레이어가 무던하게 오랜 시간을 숙성시키기 위한 내공처럼 느껴졌다. 2003년 영화 <올드보이>의 유지태 어린 시절로 데뷔한 이래로 ‘유연석’이란 이름이 각 인되기까지 10년이란 터널이 있었다.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로 ‘빵’ 터진 게 210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배우는 자석의 ‘척력’처럼 같은 극을 서로 밀어내려고 했다. 당시 차기작으로 ‘줄기세포 사태’를 소재로 다룬 영화 <제보 자>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진 전부를 포기했던 ‘심민호’를 택한 것만 봐도 그렇다. <헤드윅>이란 선택도 그동안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를 전복시키는 호 탕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사실 제 필모그래피를 전체적으로 보면 변화의 폭 이 크지 않더라고요. 제 작품을 꼼꼼히 봐주신 분들은 악역을 맡은 저의 모습 도 기억해주실 수 있지만, 일반 대중들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질 것 같 아요.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헤드윅>이란 제안이 들어오니까 큰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게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주 잠깐이지만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아본 소감에 대해 물었다. “립 컬러나 눈썹 모양 하나에도 얼굴 느낌이 확 달라지는 게 신기하더 라고요. 메이크업하는 재미를 좀 이해했어요. 그리고 힐을 고집하는 분들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웃음)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엄마 생각을 자주 했어요. 뭐랄까, 저희 엄마에게 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불쑥불쑥 했어요. 저희 집이 아들만 둘이거든요. 그동안 참 외롭지 않으셨을지…. 제가 엄마에게 딸이 되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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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Park Yongbin
헤어임 해경
메이크업임 해경
스타일리스트김 세준
장소카마코마
어시스턴트김 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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