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갑

귀족적 품위의 상징에서 이제는 독특한 스타일링의 조력자이자 클래식한 감성을 추억하게 하는 액세서리로서의 장갑.

요즘 핸드백에 장갑을 넣고 다니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장갑의 시대가 막을 내린 건 스마트폰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모든 일이 손끝에서 시작해 손끝으로 마무리되는 시대에 장갑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장갑을 끼고 있다가 전화가 오는 것을 놓치기 일쑤였고, 스마트폰을 보느라 잠시 벗어둔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남은 한 짝마저도 제빛을 잃은 채 서랍 속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게다가 손끝만 빼꼼 내밀 수 있는 긴 소매가 트렌드로 등장해 손바닥과 손등을 포근하게 감싸주니 어느 샌가 장갑은 성가신 방해물일 뿐이었다. 차라리 시린 손을 호호 부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런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올겨울에 장갑을 다시 꺼내고 싶은 이유는 보온만을 위한 용도로 장갑을 정의하기엔 그 존재감을 간과할 수 없어서다. 먼저 지난 2016 F/W 컬렉션을 돌아볼 것. 대표주자 칼 라거펠트는 장갑 마니아 아니랄까 봐 이번 시즌에도 다양한 장갑을 선보였는데, 그의 시그너처 격인 손가락 없는 장갑(스마트폰 세대에 대한 배려까지 담은)을 비롯해 니트, 트위드, 가죽 등 다양한 소재와 길이의 장갑을 여성스러운 트위드 룩에 매치했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건 중세시대 기사의 장갑을 연상케 하는 소맷단이 벌어지는 검은 가죽 장갑이었는데, 사랑스러운 핑크색 트위드 수트나 리틀 블랙 드레스에 쿨하고 강인한 감성을 주입해주는 요소였다. 로에베와 로다테 컬렉션에 등장한 독특한 실루엣의 장갑은 어떠한가? 과감한 커팅이나 과장된 러플이 더해진 롱 장갑은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실루엣을 구현하는 데 일조했다. 거의 모든 룩에 다양한 롱 니트 장갑들을 매치한 프라다 컬렉션을 보자. 케이프나 소매가 짧은 드레스처럼 팔이 드러나는 옷과 한 세트처럼 천상의 궁합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하고도 실용적인 무드를 완성하는 데에도 제격이었다. 소매의 길이에 따라 소매 겉으로 올려 덮거나, 끝부분을 접어 내린 스타일링 노하우 또한 참고할 것. 개인적으로는 추위에 벌벌 떨더라도 코트 안에 반팔 티셔츠를 입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럴 때 이 긴 장갑이 있다면 코트 소매로 찬바람이 들어올 염려도 없겠다 싶어 찍어둔 제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구찌, 마크 제이콥스, 드리스 반 노튼의 블랙 망사 장갑이었다. 자칫 블랙 타이츠를 손에 낀 것과도 같은 섬세한 소재의 장갑은 마치 마녀나 주술사를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고전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룩과 매치되어 새로운 화음을 이루어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망사 장갑을 끼고 다닐 일은 없겠지만, 은근한 페티시를 담고 있기에 연말 파티에서 미니멀한 화이트 턱시도 수트에 매치하거나 블랙 퍼 코트와 함께 한다면 독특하면서도 관능적인 룩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장갑 -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 Korea 2016년 12월호

20세기 이전, 장갑은 격식과 예의의 상징으로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책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에 따르면, 중세시대 프랑스 왕들은 임종 시에 자신의 장갑을 아들에게 주었으며, 약혼식에서 남자들은 정절의 상징으로 자신의 여인에게 장갑을 주었다고 한다. 장갑 없이 공공장소에 나설 수 없었던 시절인 로코코 시대의 멋쟁이들은 하루에도 다섯 번씩 장갑을 바꾸어 꼈고, 장갑에 사향이나 용연향 향수를 뿌리거나 요즘의 샤넬 장갑처럼 반지를 과시하기 위해 손가락 마디에 절개를 넣기도 했다. 영화 <아가씨>를 보면 히데코가 매일 하녀 숙희의 도움을 받아 아주 까다롭게 장갑을 고르는데, 이는 고모부의 귀한 책을 더럽히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귀족의 품위를 상징하는 행위로 비유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장치적 의미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영화 속 화이트 블라우스에 매치한 연분홍색 가죽 장갑(영화 포스터에서도 등장한)이나 보랏빛 새틴 블라우스에 끼워진 고동색 장갑의 컬러 매치는 인상 깊이 남을 만큼 아름다운 스타일이다.

가죽 장갑이라고 하면 블랙, 브라운, 아니면 가끔 레드나 버건디 컬러가 전부이던 2000년대 초반, 애지중지하던 블루 컬러의 가죽 장갑이 있었다. 캐멀 코트에는 독특한 컬러 매치가 되고, 블랙 코트에는 은근한 컬러 포인트가 되어 손끝이 닳도록 즐겨 꼈는데 이번 시즌 막스마라 컬렉션을 보다 보니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또, 추운 겨울날 카페에 앉아 있으면 지금의 내 나이쯤 되는 언니들이 긴 코트를 펄럭이며 들어와 머플러를 풀고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느니 차라리 끼지 않겠다는 주의라 나에게 올겨울 장갑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성가시고 의식적인 일이어야 한다는 걸 안다. 얼마 전 런던에서 잠시 한국에 온 디자이너 최유돈을 만났는데 그가 어떤 새로운 기능의 스마트폰보다 신선한 ‘푼크트 폰’을 소개했다. 전화와 문자, 음악, 메모 등만 가능한 아주 심플한 스틱형 전화기인데, 24시간 스마트폰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휴일이나 휴가지에서만큼은 아이폰을 끄고 이 푼크트 폰만 켜두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자유를 주고자 하는 ‘디지털 디톡스’ 컨셉트의 전화기였다. 이 전화기라면 다시 장갑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 장갑은 보온의 기능을 너머 손끝에 휴식을 주며 클래식한 감성을 더해주는 매개체로서의 액세서리로 새로운 역할을 추가한 듯하다. 그리고 이번 시즌 가장 아날로그적이고 보수적인 이 장갑이 오히려 가장 트렌디한 액세서리라는 건 꽤나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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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Jimmy House, Firstview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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