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의 의미

패션쇼는 단지 SNS 업로드용 이벤트가 아니다. 진지한 패션 비즈니스의 현장이자 감성으로서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때.

쇼의 의미 - 하퍼스 바자

처음 파리 패션 위크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패션 위크 출장에서 돌아온 선배들의 경험담으로만 듣던 이야기 속에 직접 들어선 기분이란. 내 이름이 적힌 인비테이션을 뜯는 순간부터 쇼장에 걸어 들어가서 쇼가 끝나는 순간까지,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기 위해 온갖 감각의 더듬이를 세우고 감동에 젖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쇼가 끝나면 차에 올라타 쇼장에 온 사람들부터 쇼의 음악, 컬렉션의 컨셉트, 옷의 디테일, 그리고 모델들의 걸음걸이며 디자이너의 뒷얘기까지 그 쇼에 대해 한껏 떠들다 보면 다음 쇼장에 도착하곤 했다. 흥분과 영감으로 가득 찬 그 대화 속에서 다가올 시즌을 위한 생생한 아이디어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비밀리에 다음 6개월을 위한 스페셜한 기획이 진행되곤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언제부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물론 드라마틱한 쇼의 감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지만 그 강도와 성격이 다르다고 할까? 사진과 동영상은 물론 실시간 라이브로까지 거의 모든 쇼가 생중계되는 요즘이다 보니, 만약 처음으로 그 장면들을 목도한다 한들 특별하고 압도적인 감탄은 느끼지 못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어느 순간부터는 쇼가 끝난 후의 대화도 사라졌다는 거다. 차창 밖을 볼 시간마저 없어진 지 오래다. 쇼가 끝나면 서둘러 차에 올라타 방금 아이폰으로 촬영한 쇼 사진들을 체크하고 업로드하다 보면 다음 쇼장에 도착하곤 한다. 쇼를 보는 동안에도 어느새 모든 신경은 아이폰으로 쇼의 장면들이 잘 촬영되고 있는지에만 곤두세우게 되었고, 어쩔 땐 쇼장에서 쇼를 보고 나왔는데도 아이폰 스크린으로 쇼를 본 건지 실제로 본 건지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프런트 로는 마치 작은 포토그래퍼 존과도 같다. 피날레가 시작되면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아이폰을 높이 치켜들고 더욱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옆자리의 경쟁 매체와 은근한 눈치 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때론 패션쇼에 있어 디자인적인 요소나 컬렉션에 담긴 스토리만큼이나 중요한 건 시선을 끌 수 있는 이벤트적인 요소가 되었다. 적절한 해시태그는 물론, SNS에 올렸을 때 흥미를 끌 만한 기발한 무언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잘 재단된 수트 한 벌보다 독특한 퍼포먼스가 더 많은 타임라인을 장식하니 말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변화의 흐름에 따라야 하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디지털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패션 위크 자체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누구나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는 거대한 박람회가 되었으니 패션쇼의 역할과 효과가 대중적으로도 광범위해지고 극대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온라인 이상의 오프라인 패션쇼가 지니는 본질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끔은 쇼를 보고 나온 후에 대체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이더 아크만 쇼가 끝난 후 고요한 침묵 끝에 기립박수가 울려 퍼지던 감동의 순간이라든지, 에르메스의 캐시미어 코트가 모델들의 걸음걸이에 따라 어떤 무게감으로 찰랑이며 움직였는지, 고요 속의 잔잔한 떨림과 함께 느릿느릿 등장한 콤 데 가르송 쇼의 아방가르드한 실루엣과 범상치 않은 소재까지.

오프닝의 신선한 충격부터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디자이너의 룩들을 보며,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듯 디자이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섬세한 디테일에 감탄하고 컨셉트를 상상하고 추리하고 깨닫고 결론짓는 이 모든 섬세한 과정들이 만들어낸 진짜 패션쇼의 모습을 언제부턴가 잊고 있는 건 아닐는지.

스탠딩 석에서 발꿈치를 들고 모델들의 어깨까지만 겨우 보고 나오면서도 느낄 수 있었던 컬렉션의 힘과 열기, 그리고 잊지 못할 기억과 잔상들이 깊이 남았던 시절과 달리, SNS 업로드가 목적인지 싶을 정도로 이슈만 좇고 심지어는 그것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씁쓸하기도 하다.

게다가, 패션 위크는 단지 패션쇼 퍼레이드의 기간이 아니라 진지한 패션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거대한 만남의 장이다. 쇼에 참석해서 컬렉션을 취재하는 것을 넘어 전 세계 패션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 만큼 쇼장에서 혹은, 쇼가 끝난 후의 미팅에서 만난 디자이너와 브랜드 담당자, 에디터, 바이어들 사이의 대화에서 누구보다 앞서 다음 시즌을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패션계의 흐름이 결정되니 말이다.

특히 신인 디자이너들이나 새로운 매체와 숍의 바이어들에겐 존재감을 직접 알리고 피드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디자이너건, 매체건, 백화점이건, 스토어건 패션 위크에 함께하지 않으면 치열한 패션계에서 마치 한물간 배우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

“결국 패션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계속되어야 해요. 온라인을 통해 거의 모든 쇼가 겉핥기 식으로 모두에게 공유되다 보니, 모델, 프레스, 스타일리스트, 바이어, 고객들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시간들이 더욱 소중해진 것 같아요. 또 디자이너로서 이 특별한 ‘쇼타임’을 위해 집중도 있게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쇼를 하지 않으면 디자이너 스스로도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거나 해이해지기 쉽죠.”

지난 두 시즌간 프레젠테이션과 디지털 컬렉션으로 패션쇼를 대체했던 럭키 슈에뜨의 디자이너 김재현 역시 쇼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은 단순히 패션쇼를 하느냐 마느냐로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결국 패션쇼가 브랜드의 자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변함이 없으며, 브랜드의 인지도와 이미지, 영향력, 그리고 실제로 매출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갤러리나 콘서트장에서 플래시를 터트리거나 찰칵 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게 금기시되는 것처럼 패션쇼 역시 런웨이가 진행되는 순간만이라도(피날레는 그렇다 쳐도) 서로가 진지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으로 지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금지의 개념보다는 일종의 배려와 예의랄까? 패션쇼를 버즈로 만들기보다는 그 자체는 본질적인 목적에 집중하되 컬렉션을 이슈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와 콘텐츠가 필요할 때다. 결국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포털사이트에 키워드만 쳐도 쏟아지는 누구나 아는 정보가 아닌, 그들만의 비밀스럽고도 진정성 있는 또 다른 감성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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