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수트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수트가 가진 매력에 비로소 눈을 뜨다.

옷입기에 거칠 것이 없었던 20대 시절에도 흰색 수트를 입는다는 건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마치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숭고한 자태를 마주할 때면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남다른 자기애를 가진 여성들이 입는,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룩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 모든 옷을 받아들이는 것이 패션 에디터의 본분이라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근거 없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그런 나에게 화이트 수트에 대한 판타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건 다름 아닌 2017 S/S 셀린 쇼에 등장한 한 벌의 화이트 수트. 속살이 은근하게 보이는 시스루 톱과 팬츠 위로 새하얀 오버사이즈 재킷, 밑단을 둘둘 접어 올린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한 그 룩은 ‘화이트 수트 룩’ 하면 으레 떠올렸던 내 머릿속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단숨에 흐트러뜨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헬무트 랭이나 하이더 아커만과 같은 모더니티 대가들의 손에서 탄생한 실험적인 화이트 수트를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셀린의 수트만큼 나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는 당시 에디터의 패션적 자아가 미성숙했기 때문이리라.) 그때부터 화이트 수트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여성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 한구석에 조용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듯, 화이트 수트를 실제 옷장으로 가져오기엔 몇 가지의 고민이 뒤따르곤 한다.

일단 아래위를 새하얀 컬러로 입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첫 번째. 여기엔 세탁이나 관리에 대한 어려움도 포함된다. 두 번째는 웬만한 내공으로는 팬츠수트를, 더군다나 흰색 수트를 소화하긴 어려울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이번 2018 S/S 컬렉션에서 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줄 다채로운 디자인의 화이트 수트가 등장했다는 것.

Acne Studios

Jil Sander

Victoria Beckham

특히 아크네 스튜디오 쇼에서 발견한 화이트 수트 룩, 단추를 세 개쯤 풀어 헤친 포인티드 칼라의 블랙 셔츠에 남성복이라 해도 무방한 오버사이즈의 화이트 수트를 매치한 이 룩은 팬츠수트의 초심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1970년대 비앙카 재거의 로큰롤 수트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룩이랄까. 이와 비슷한 무드의 화이트 수트는 질 샌더, 톰 포드, 어웨이크, 조셉, 빅토리아 베컴 등의 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수트의 공통점은 별다른 디테일이 없는 심플한 디자인과 간결한 실루엣. 때문에 이너웨어의 선택이나 백, 슈즈의 매치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입는 사람의 애티튜드가 스타일링의 성패를 판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1년 4월, 런던을 방문한 캐서린 헵번의 모습.

화이트 팬츠수트 차림으로 행사장에 도착한 브룩 실즈.

마이클 코어스의 화이트 수트를 캐주얼하게 소화한 크리스티 털링턴.

영화 ‘더 링거’의 프레스 컨퍼런스에 참석한 비앙카 재거.

이럴 땐 당당한 애티튜드를 가진 과거 혹은 현재의 패션 아이콘을 거울 삼아 들여다보며 나만의 롤모델을 찾는 것이 해답이다. 화이트 수트를 편안한 일상복처럼 소화해내는 크리스티 털링턴, 수트에 중산모를 매치하거나 퍼 숄, 보타이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냈던 비앙카 재거, 매니시한 수트에 멋진 미소만으로도 그만의 오라를 만들어내는 브룩 실즈, 우아함과 카리스마가 공존하는 수트 스타일링을 선보였던 캐서린 헵번 등, 저마다의 스타일로 수트 룩을 연출했던 그녀들에게서 입는 사람을 오롯이 드러내는 화이트 수트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테니. 화이트 수트는 완벽하게 소화하기 어려운 피스임이 분명하다. 온몸으로 태양빛에 맞서는 흰색 팬츠수트를 일상에서 입기 위해 약간의 도전정신과 당당한 애티튜드는 필수일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이곳 패션 월드는 다가가기 쉬운 것보다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마련. 지금이야말로 티끌 하나 없는 순백색 수트의 매력에 눈을 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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