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손예진

아름다운 빛이 부서지는 코트 다쥐르 해변을 손예진과 함께 걸었다. 이 계절에 가장 낭만적인 도시 앙티브는 맨 얼굴의 그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무수히 많은 변곡점들을 지나 다시 출발점에 선 배우 손예진은 영원히 우리의 심장을 움직이게 만드는 로맨스의 주인공일 것만 같다.

원피스와 벨트, 캉캉 스커트를 연상케 하는 러플 디테일의 체인 백은 모두 Michael Michael Kors, 버건디 컬러 선글라스는
Tom Ford by Sewon Inc 제품.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인가요?

혼자 여행을 다닌 지는 오래 되지 않았어요. 아직까지도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요즘엔 친구들이 사는 도시에 종종 놀러 가요.

서울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도시가 있나요?

저에게 서울은 그렇게 편안한 도시는 아니에요. 항상 일이 있고, 직업적으로 편하게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어찌 보면 더 불편하죠. 이렇게 슬리퍼를 신고 맨 얼굴로 아침을 먹으러 나오기엔 해외가 더 편해요.

경유지였던 파리 공항에서 혼자 바에 앉아 맥주 한 잔을 시켰을 때, 그제서야 조금 풀어져 보였어요. 우리가 여행을 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달까요?

맞아요. 사실 술을 잘 못 마시는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찍으면서 술이 늘었어요. 맥주 맛을 알게 됐거든요. 예전에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알딸딸하게 취했는데 이제는 두세 잔은 거뜬히 마셔요.

드라마의 초반부에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도 술의 힘을 빌려 찍은 신이라고 들었어요.(웃음) 연기할 때 술이 가져다주는 마법이 있었어요?

촬영 초반부였고 스태프들과도 아직 어색할 때라 맨 정신으로 찍을 수는 없었어요.(웃음) 이번에는 드라마 안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 술을 마셨어요. 진짜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취한 척 연기하는 거랑 진짜 취해서 연기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일반적인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는 스케줄상 마시고 싶어도 못 마셔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경우에는 하루에 열두 시간의 촬영 시간을 넘긴 적이 거의 없었어요. 영화 촬영 현장만큼이나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잠도 충분히 잤죠. 감독님의 철저한 계산과 정확한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이상적인 환경이었어요.

드라마만 봐도 안판석 감독님은 굉장히 섬세한 분인 것 같아요.

삶과 인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신 분이죠. 작품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감독님은 촬영 중에도 배우나 스태프들과 함께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자주 하려고 하는 편인데, 좋은 걸 보고 좋은 걸 먹는 경험들이 좋은 창작물을 낳는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에요. 앙티브에 와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감독님의 그 말을 떠올렸어요.

베이식한 탱크 톱, 플라워 패턴을 덧입은 데님 팬츠는 모두 Michael Michael Kors, 오른쪽 팔에 착용한 블루 앨리게이터 스트랩의 ‘포제션’ 워치, 라피스라줄리 세팅의 ‘포제션’ 오픈 뱅글 브레이슬릿, 왼쪽 팔에 착용한 다이아몬드 세팅의 ‘포제션’ 오픈 뱅글 브레이슬릿은 모두 Piaget 제품.

이번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상대 배우 정해인은 한 인터뷰에서 “배우 손예진을 보며 현장에서 주연 배우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게 있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어요. 촬영 현장에서 주연 배우가 해야 할 몫은 뭔가요?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되게 부끄러워요. 저는 연기를 즐기면서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스트레스 받고 아파하는 쪽이에요. 항상 내 거 하기에 급급하죠. 다만 어느 순간부터 현장에서 선배, 언니, 누나가 되다 보니까 다른 배우들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하고 있고, 스태프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보여요. 그게 느껴져서 뭉클하고 짠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막 먼저 다가가서 살갑게 구는 성격도 못 돼요. 다만 이번에는 그 마음을 서로 알았던 것 같아요. 다들 진심으로 임했고, 또 그 진심이 통했던 드문 현장이었죠. 그게 다 감독님께서 만들어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상업적인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같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런데 드라마는 우리끼리의 작업이 아니잖아요. 방영되는 순간부터 대중이랑 같이 호흡을 하는 것이고, 엄청난 반응들이 따라다니죠. 그럴 때 주연 배우가 흔들리거나, 들뜨거나, 시청률이 안 나와서 기분이 안 좋으면 안 돼요.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존재해야 하는 거죠. 다행히 우리는 처음부터 16부까지 대본을 다 본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감은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가면서 집중하려고 했어요.

영화 <클래식>에서 코까지 빨개지면서 우는 손예진의 모습을 보면서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나 최근에 인상적이었던 작품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울지 않는 강인한 여자였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며, 손예진이 그동안 연기한 여자들을 떠올렸어요. 이번에 연기한 윤진아 캐릭터와는 실제로도 동갑이잖아요. 그녀와 비슷한 부분이 있나요?

저랑 진아는 성격적으로는 아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솔직한 편이에요. 솔직한 게 무기는 아닌데, 그냥 나도 상대도 솔직한 게 가장 편하더라고요. 그런데 진아는 너무 착하고 여려서 세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남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책하고 아파하고 후회하는 친구다 보니까 짠할 때가 많았어요. “감독님, 여기에서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이런 말을 몇 번 했어요.(웃음) 그리고 저는 스스로를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번 드라마를 찍으며 했어요. 감독님이 저에게 되게 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는 거예요. 가끔 ‘무’의 상태에 가까운 해맑음이 나온다면서요. 그러고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나는 이래요’라고 스스로를 정의 내릴 때, ‘아, 저 사람은 스스로를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싶을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요즘엔 그냥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해요.

함께 연기하며 지켜본 배우 정해인은 어떤 장점을 가진 배우였어요?

아직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감성이 풍부했어요. 연기를 할수록 컨트롤을 하게 되는데, 그에게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감성이 있어요. 그 모습이 되게 예뻐 보였어요. 자칫하면 과잉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인데, 타고난 센스가 있어서 그것 마저 자신의 캐릭터가 되더라고요. 저 역시 그랬던 시절이 그립기도 해요. 왜냐면 이제는 웬만한 것들이 다 이해가 되고, ‘이 정도에 눈물 흘리는 건 신파야’ 이렇게 되니까.(웃음)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의 서머 드레스, 뉴트럴 컬러의 버킷 백은 모두 Michael Michael Kors,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깨 라인에 커팅 디테일이 가미된 원피스는 Michael Michael Kors, 터쿼이즈와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스몰 사이즈의 ‘포제션’ 펜던트 목걸이, 두 번 감아 연출한 커닐리언 세팅의 ‘포제션’ 펜던트 목걸이, 왼팔에 착용한 ‘포제션’ 오픈 뱅글 브레이슬릿은 모두 Piaget 제품.

오랜만에 연애 초반의 풋풋한 감정을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이 드라마를 사랑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촬영하면서도 설레었던 순간이 있어요?

너무 자주 설레었죠.(웃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일상의 연애는 거창하지 않잖아요. 집 앞 놀이터에서 데이트를 하고, 몰래 손잡고 있다가 사람들이 오면 아닌 척하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다가 미묘한 말의 뉘앙스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자고 이야기해놓고 미치도록 후회하고.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리얼한 상황들이 재밌고 찍으면서도 설레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으니까, 좋은 감정들이 끝나고 힘든 시간들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 순간이 더욱 소중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사랑스러운 순간은 곧 지나가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잖아요. 드라마 속 캐릭터도,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도 사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네, 저는 그래요. 어릴 때는 항상 다음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의 좋은 것들이 영원할 줄 알았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너무 슬펐는데, 이제는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것들이 끝날까 봐 불안해하는 대신에 이 순간을 즐기는 거예요. 그게 인생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거겠죠? 또한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지속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배우에게는 어떤 작품이 그럴 것 같아요.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좋은 촬영 현장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으니까.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갈 때의 시원섭섭한 기분이랑 비슷할 것 같기도 해요.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집에 갈 때는 잘 모르는데, 항상 작품이 끝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뜰 때가 제일 외롭고 허무하고 허전해요. 그렇게 연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 싶다가도 이렇게 나와보면,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웃음) 왔다갔다해요. 갑자기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생각나네요. 작품을 하는 서너 달 동안 책을 못 읽어서, 이곳에 올 때 책을 대여섯 권 가져왔거든요. 서명숙 작가의 <영초언니>라는 책에 ‘주둔군 이론’이라는 게 나와요.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밀릴 때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하는 건 그곳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인생에서도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 반드시 그곳에 심리적 주둔군을 많이 남겨두게 되고,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는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건 따뜻한 볕이 들던 시절이 아니라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일지도 모른다.” 그 구절이 괜히 와닿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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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Ahn Jooyoung
헤어 무진
메이크업 미정
스타일리스트 이윤미
기타 프로덕션/ 이승연
출처
5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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