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채의 초상화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온종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요. 저와 작가님 사이에 놓인 테이블의 거리만큼 적당한 거리감과 관심과 친절함이 느껴져요.

화병이 프린트된 셔츠는 Ports 1961, 팬츠는 Neil Barrett, 앵클부츠는 Stuart Weitzman 제품.

커다란 창밖으로 초여름의 풍경이 흐르는 봄날, 정은채는 제일 처음으로 문성식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녀는 철저히 객체가 되어 두어 시간째 앉아 있으면서도 좀처럼 권태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제법 낯을 가리는 두 사람은 띄엄띄엄 몇 마디 나누다 이내 편안하고 친밀한 침묵 속으로 미끄러졌다.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온종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요. 저와 작가님 사이에 놓인 테이블의 거리만큼 적당한 거리감과 관심과 친절함이 느껴져서 이런 작업 처음인데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정은채는 그림의 모델이 된 적은 없지만 최근 개봉한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관찰의 대상이 된 경험이 있다. “그 영화도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인물을 관찰하고 그 반응을 담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가까이에 있는 카메라가 미묘하게 변하는 심리묘사를 담아내면서. 그래서 작가님이 보신다면 본인이 날 보고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선 또 어떻게 다른 시선으로 절 그려낼까,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물 내음 풍기는 검고 긴 머리에 말갛고 차분한 얼굴로 모델에 집중하는 정은채에게서 문성식 작가는 찔레꽃을 떠올렸다. “야생 꽃이면서 새하얀 찔레꽃의 퓨어한 느낌, 영화감독들이 말하는 하얀 도화지 같은 배우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진짜로 가능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 뭔가 단단한 게 있는 듯했고, 새하얀 피부와 새까만 머리의 콘트라스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독특한 형태의 원피스는 Céline 제품.

영화를 하기 전 디자인을 전공한 정은채는 즐겨 전시를 보러 다닌다. “노석미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고요, 페리지 갤러리에서 전시할 때 잭슨홍 작가의 작품을 보고서 그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게 됐어요.” 문성식 작가의 작품 중에는 ‘정원’ 시리즈를 좋아한다. 무대처럼 직사각형으로 지어진 공간에 인공적 느낌의 정원을 그린 작품들이다. “자연에는 없는 직선으로 플랫한 땅을 만들고 그 위에 갖가지 나무들을 세필로 세워 그렸는데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이 각자 방백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는 그림이었어요. 컬러감도 너무 좋고요.” 드로잉 미팅에서 모델은 관찰되는 동시에 뜻하지 않게 작가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정은채의 예리한 눈은 도구에 많이 머물렀고, 호기심 역시 어떤 물감을 사용하는지, 같은 좀 더 실질적인 쪽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는 아크릴 페인팅이고 물로 하는 걸 좋아해서 대체로 물을 섞어 쓰는 편이에요.” 반대로 작가의 호기심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는데 영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이 영화배우가 된 계기를 궁금해했다.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숲 한가운데 학교랑 기숙사만 있는 그런 곳이었죠. 그러다 보니 굉장히 고립된 느낌이었고, 바깥 세상에 대해서 온갖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었죠. 그런 궁금증이나 결핍감을 해소해준 게 영화였고요.”

정은채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공백으로 인해서, 문성식은 시골 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서 공통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교류에 대해 늘 갈망이 있었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재미있어 했어요. 영화계에 들어온 지금은 그 시절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지만 여전히 관심은 계속돼요.” 차분하고 섬세한 두 관찰자가 조심스럽게 나눈 교류의 기록이 정은채의 초상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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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헤어손 혜진
메이크업최 시노
스타일리스트박 세준
어시스턴트유 진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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