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노와 함께한 식탁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현재까지도 매일 7시간씩 패턴 작업을 하는 현직 디자이너 노라노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91세의 매혹적인 여인과 마법 같은 점심식사를 즐겼다.

비오는 일요일 오후였다.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도착했다. 빗방울이 연잎 위를 굴러가듯, 또르르. 91세의 나이라 믿겨지지 않는 자태였다. 촬영을 하기 전 화장을 고치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얇은 입술을 스윽 슥 지나가는 립스틱과, 다 쓴 립스틱과 브러시를 담는 오래된 가죽 케이스를, 기다란 속눈썹을 비추는 작은 손거울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 소리를 내는 기다란 목걸이를. 찰칵찰칵. 셔터 소리에 맞춰 그녀가 능숙하게 자세를 바꿀 때마다, 내 몸이 요상하게 꼬였다. 먼 곳에서 도착한 신문물을 바라보듯, 그 속에 숨겨진 고귀한 골동품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쩌면 그녀의 세월을 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게 몇 년 전이냐, 열아홉이니까 육십 몇 년 전에, 미국에 진출한 게 50대 초반이니까 삼십 몇 년 전에. 기억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내 어머니와 내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으로 종횡무진. 꼭 먼 나라에서 돌아온 큰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수박이나 참외 같은 걸 까먹으면서, 큰언니가 본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여인에게 반했다. 반했다는 말로밖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인터뷰를 하는 내내, 시골 소년처럼 자꾸 구석으로 숨어들어가 그녀를 훔쳐보기를 반복할 리가. 인터뷰를 마치고 손이나 한번 잡아볼까 기회를 보다가, 그녀가 먼저, 우리 한번 안아보자, 라고 말했을 때, 덥석 오래오래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을 리가. 다음 날 무슨 빌미로 전화나 한번 해볼까 궁리를 하는 나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풋내기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날, 텔레파시처럼,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연서를 받은 것처럼 황홀했더랬다. 우리 친구 해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더랬다.

두고두고 생각해보았다. 나를 시골 풋내기 소년으로 만들어버린 한 여인에 대해.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딱 절반을 살아온 나를, 홀딱 빠지게 만든 91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평생 백수건달, 고급건달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최장수 현직 디자이너의 시간에 대해. 그녀의 마지막 말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사랑받고 살았으니까. 알 것 같았다. 나를 매혹시킨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사랑스러움. 사랑스러움을 나이테로 간직한 아름드리나무. 그 그늘에 잠시 머문 나조차 사랑스럽다 믿고 싶게 만드는 요상한 매혹.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서로 사랑스럽기 위해서. 

천운영이 노라노를 위해 준비한 초리초와 파에야.

초리초와 파에야 그리고 장미꽃

어머나, 파에야잖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 오래 살다보니까 이런 일도 다 있어, 인터뷰하면서 이런 대접도 받고, 우리도 집에서 파에야 많이 해 먹었는데, 스페인에서는 거의 매일 먹었는데. 이건 스페인 소시지 맞죠? 초리초? 아까부터 이걸 하나 집어먹고 싶던 걸 얼마나 참았는지, 스페인에 온 것 같다, 정말. 파리에서 기차 타고 스페인으로 가는데, 앞에 앉은 애가 소시지를 잘라서 빵에 얹어 먹고 있어. 그런데 내가 먹고 싶은 표정이었나 보지? 한 조각 잘라서 나한테 줘. 그래서 먹어봤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고춧가루가 매콤한 게 딱 우리 입맛이더라고.

파에야는 그렇다치고 초리초 한 조각에 이토록 격렬한 반응이라니.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사람. 기차 안에서 초리초를 건네던 스페인 소녀를 생각했다. 소녀는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검은 머리칼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자기가 먹던 초리초 한 조각을 건넸을 것이다. 국경에 처음 나타난 동양 여자를 보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던 은행 직원들처럼. 마드리드 플라멩코 레스토랑 앞에서 장미꽃 두 송이를 사서 건네주던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첫 스페인 여행은 잊히지 않아. 다음에도 여러 번 갔지만, 그때 기억하고는 비교 할 수도 없지.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배 타고 마요르카까지 갔어요. 안익태 선생네 식구들이랑 지내고 얼마나 재밌었는지. 마드리드에서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갔는데, 무대가 있어서 스패니시 춤을 추는 곳이야. 앉아서 이렇게 보니까, 옆에 프랭크 시나트라가 있는 거야. 그때 에바 가드너하고 한참 연애할 적인데, 촬영이 있어서 온 모양이더라고. 쳐다보면 촌년처럼 보일까 봐 슬쩍 보고 말았어요. 촌년처럼 노는 거 싫잖아 우리. 공연 끝나고 나오는데, 막 시끄러워. 프랭크 시나트라가 팁을 막 뿌리면서 나오고 사람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고. 또 촌년처럼 보이기 싫어서 쳐다도 안 봤지. 그런데 나한테 꽃을 들고 온 거야. 그런 데는 보통 꽃 파는 여자들이 있거든. 거기서 장미꽃을 두 송이 사서 온 거지. 그리곤 물어. 어디서 왔냐고. Where are you from?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지. Original? Or region? 그러니까 웃더라고. 나는 한국 사람이고, 지금은 파리에서 여행 왔다, 그랬지.

동행했던 유학생이 조금만 눈치가 있고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날 노라노의 인생에 다른 무늬가 새겨졌을까? 꽃을 받은 사람이 나인 것처럼 달콤한 상상을 하며 흐흣 속으로 웃고 있는데, 그녀가 말한다. 안 되겠다, 다음엔 내가 점심을 대접할게요. 어머님이랑 같이 와요. 어머니 뭐 좋아해요? 파에야를 다 먹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베풀 밥상을 생각하는 이 여자의 사랑스러운 프로세스. 

일요일 저녁의 스키야키

그녀는 어릴 적 외할머니 손에 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 나이가 서른일곱. 할머니는 할아버지 입맛을 똑 닮은 그녀를 유독 사랑했다. 치즈며 커피 맛을 알던 멋쟁이 할아버지. 미식가인 데다 음식에 까다로웠던 터라, 그 비위를 맞추느라 할머니 음식 솜씨가 좋았다. 간장떡볶이, 탕평채, 가지장아찌, 두부전골. 그녀는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한다.

가지를 살짝 데쳐서 간장으로 장아찌를 만드는데 아주 맛있어. 그리고 두부전골, 우리 집이 두부전골로 아주 유명했어. 두부를 잘라서 고기 다진 걸 넣고 샌드위치처럼 만들어서 부쳐. 두부부침에다 은행이랑 채소랑 다 넣고 신선로를 끓여. 얼마나 예뻐. 손님 올 때면 꼭 두부전골, 시집가기 전에 신랑한테도 할머니가 그거 해줬어. 

아버지는 고아였는데, 어느 일본 사람이 양자 삼아 키웠어. 만주에서 큰 여관을 하던 사람이었다지. 거기 일하러 들어갔다가, 애가 성실하고 그러니까 양자 삼아 학교도 보내주고 그런 거야. 그때 만주 학교에 한국 사람이라고는 우리 엄마랑 아버지만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생각했대. 출세해서 저 여자랑 결혼해야지라고. 그런데 정말 출세해서 결혼했잖아.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요리도 잘 하시고, 이성적이고. 우리 딸들이 아버지 놀리고 그랬어. 아버지 일본 유학할 때, 이따바 했어?라구. 이따바는 주방장, 요리사라는 뜻이에요. 그만큼 요리를 잘하셨다는 얘기지. 

일요일이면 아버지가 데파토 식품점 가서 음식 골라 사 오시거나, 아소혼 중국집 같은 데 데려가서 요리를 먹였어. 아니면 새벽같이 장을 봐서 음식을 해줘. 엄마는 주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고 직접 해주시는 거야. 스키야키 같은 거. 그때 집 옥상에 베란다가 있었는데, 등나무 아래 식탁을 차려. 우리는 주루룩 앉아 있고. 아버지가 입들 벌려, 그려면 아 하고 벌리고, 아버지가 하나씩 입에 넣어주고. 얼마나 재밌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재밌게 살았어. 우린 시집가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잖아. 우리처럼 재밌게.

하이쿠와 냉면 그리고 이달의 점심

아주 미남자였어. 만나기 전에 사진으로 봤는데, 얼굴에 반했지. 얼굴에 반하고 하이쿠에 반하고. 편지 말미에 하이쿠를 적었더라고. 그거 받고 웃었잖아. 이 정도야, 하면서 나도 답신으로 하이쿠를 적어 보냈지. 하이쿠에는 하이쿠로. 그걸 들고 온 동네 자랑을 하고 다녔대. 하이쿠를 아는 조선 색시라면서. 그거 아니더라도 일급 색시감이었잖아, 내가. 그때 열일곱 살. 몇 년 전이야. 다 옛날 얘기다. 그때 계속 살았으면 지금의 노라노는 없었겠지? 

내가 어디 강의 같은 데 가서 말해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뭐냐. 두 가지야. 첫 번째 이혼한 거. 두 번째 미국에 진출한 거. 미국 가서 히트 치니까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되더라고. GNP 50불에서 2만 불까지. 그때 누가 패션을 알아줘? 손발을 묶어놓고 디자인을 하는 거야. 미국에 가니까 손발이 자유로워. 성공했지.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한다는 생각으로. 뉴욕에 쇼룸을 열고. 잘한다 하니까 신이 나서 더 잘하지. 그것들이 지금의 부와 명예와 모든 걸 갖다 준 거야. 그때가 50대 초반? 제일 무르익었을 때였지. 

제일 잘한 건, 그래 이혼한 거야. 그 사람, 몇 번 우리 집에 와서 사정을 하고 그랬지. 그래도 마지막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이혼해주는 것밖에 없다고, 해줬어. 착한 사람이야. 내가 이혼하겠다면 난리가 날 테니, 당신 집에서 하는 걸로 해라 부탁했더니, 결국 이혼을 하겠다고 찾아왔어. 할머니는 멱살을 잡고 때리고 엄마는 울고불고. 아버지는 딱 중립을 지키고 천장만 보고 계시는 거야. 그 당시에는 이혼이 어마어마한 일이니까. 지금 맘이 약해지면 안 된다. 난 아무 소리 안 하고 기다렸지. 할머니 엄마 가라앉고 나서, 아버지가 성인이니 본인의 뜻대로 하는 게 원칙이다, 딱 마무리를 하신 거지. 이혼 수속을 마치고 냉면을 먹고 헤어졌어. 

나이 들고 되돌아보니까 내가 잘못한 거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그 사람한테는 너무 잘못한 거 같아.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너무 야박하게. 나는 강한 사람인데, 그는 약한 사람이거든. 내가 조금이라도 여유를 보이면 무너질까 봐, 그래서 무섭게 냉정하게 했는데, 너무 심하게 했나 싶기도 해. 결과적으로 잘한 거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참 특별한 관계였어. 멋지고 유머 있고, 좋은 사람이었어. 지금? 죽었지. 꽤 됐네. 그 사람 죽기 전에 한 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났어. 만나서 점심 먹고 헤어졌는데. 점심은 꼭 내가 사. 맨날 돈이 없어, 그 사람은. 자긴 얻어먹어도 된대. 자기가 이혼을 해줬으니까 내가 일을 할 수 있었고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는 거지. 그 말도 맞잖아?

이혼하고 이화여대에 가서 문학을 공부할까 하다가 방향을 틀었어. 동창 중에 하나가 미군정청에 취직한 애가 있었는데, 타이프를 친다는 거야. 영어를 하고 타이프를 치면 된다는데, 타이프가 어딨어. 미군부대에서 하룻밤 빌려와서 그걸 실물대로 그리고 돌려줬지. 거기다 연습을 하고 영어회화 책을 하나 사서 베고 잘 정도로 공부를 했어. 절박했지. 절박하니까 되는 거지. 캡틴이 영어로 면접을 보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래서 솔직히 말했지. 못 알아듣겠다고. 그랬더니 웃어. 미국 사람도 못 알아듣는 슬램 영어라고. 솔직함을 시험해본 거야. 그래서 취직을 했어.

천운영과 노라노의 점심 식사. 테이블에 있는 백합은 노라노의 팬이라는 천운영 작가의 어머니가 준비하였다.

나는 곧 100세,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런데 다시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으셨어요? 정말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을 텐데요. 

아이, 무슨. 조용히 내 몸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100% 바빠요. 미국서도 데이트를 하면 3개월 이상을 안 했어요. 그러면 관계가 깊어지거든. 시끄러워. 요새 생각해보면, 연애도 허상이다 이거야, 지내고 나면,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알게 되는 게 중요하지.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인생에서 자기하고 맘이 통하는 사람 만나는 게 진짜 아름다운 거 같어. 드물어. 그런 사람 만나는 게. 내가 어제 비도 오고 해서, 가만 누워 생각해봤어, 인생이 뭐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그저 사람과 사람, 서로 마음이 통하던 사람만 기억에 남고 그게 귀중해. 서로 살면서 주고받았던 마음씨 같은 거. 지금까지 나를 기쁘게 해준 것들. 못되게 한 건 다 잊어버려. 여태까지 누구 탓하거나 싸운 적이 없어요. 나한테 못되게 군 사람들도 있는데, 다 가버렸어. 산에 가 드러누워 있단 말이지. 90이 돼서 생각나는 사람은 나한테 잘한 사람이야. 그 사람 참 고마웠지, 하면서 지금도 가슴에 다가와.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잘해야 해요. 누구든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문학을 하셨을 거 같아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내가 본래 문학에 소질이 있었어요. 언젠가 박경리 선생이 그러더라고. 노 여사가 문학을 했으면 크게 됐을 거야, 나는 패션을 하면 그리 됐을 거고. 알아보셨던 거지. 난 사실 욕심이 없어. 욕심이란 건 목적의식이 있는 거거든. 최고가 되겠다, 세계적으로 성공하겠다. 그런데 나는 결과도 상관없고, 그냥 새로운 거 도전해서 힘든 일을 하는 게 재밌어. 천생 건달이야, 고급 건달. 고급 건달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일 열심히 해서 돈도 열심히 벌어야지. 어려운 일이면 더 좋아하고. 돈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야. 돈도 필요하지만, 돈은 한계가 있는 거고, 안목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저도 건달로 살고 싶어요. 

이미 건달이야. 작가가 식당이라니. 이런 건달이 어디 있어? 건달은 건달을 알아본다니까? 그런데 중요한 게 있어. 진짜 건달로 살려면 이걸 기억해야 해요. 나는 87세에 죽을 줄 알았거든요. 사주를 봤는데, 그게 죽을 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만 계획했어요. 85세에 다 그만두려고 정리를 했잖아. 그런데 지금 91세야. 앞으로도 더 살 거 같아. 100살까지는 끄떡없어. 하늘이 준 보너스지. 내 플랜은 85세에 끝났잖아요. 그런데 또 줘. 오래 사는 건 더 많은 일을 하라는 거야. 늙어서 할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해. 그게 바로 죽은 거지.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지금 사람들은 120살을 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오래 살 플랜을 세워놔야 해요. 일할 계획. 그거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려면 체력과 능력에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해요. 10%를 남겨두세요. 뛰지 말고 걸으세요. 오래 살면서 오래 일할 플랜을 세우는 거. 이거 굉장히 중요해요. 꼭 기억하세요.

수십 년을 같이 살다시피 한 친구가 있었는데 마지막에 매주 주말 나랑 같이 보냈어요. 토요일 저녁 먹고 다음 날 아침 점심 해서 먹고 음식도 싸가지고 가고. 2년 전에 죽었거든. 그런데 죽기 몇 년 전에 갑자기 정식으로 절을 하는 거야. 맘먹고 하는 거래요. 정신이 말짱할 동안에 인사 한번 하려고 했대. 자기가 올드미스로 따분한 인생을 살 뻔했는데, 나를 만나서 참 재미난 인생을 살았다고. 고맙다고. 내 마음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무튼 우리 또 만나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중요하니까. 알았지요?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다.

※ 디자이너 노라노는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아버지와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어머니 사이에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노명자.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던 중, 전쟁 직전에 고국으로 돌아와 디자이너 활동을 시작했다. 반도호텔에서 최초의 패션쇼, 최초의 기성복 시장, 70년대 미국 시장 진출, 연극 무대와 영화 의상을 비롯해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을 유행시킨 장본인. 91살인 현재까지도 매일 7시간씩 패턴 작업을 하고 있는, 가장 오래 디자이너로 살아온 현직 디자이너이다. 

※ 소설가 천운영은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바늘>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바늘> <명랑> 외에 장편소설 <잘가라 서커스> <생각>을 출간하였다. 서울 연남동에 스페인 음식점 ‘돈키호테의 식탁’을 차리고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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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천운영(소설가)
사진 Lee Ja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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