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의 미래

근 미래의 패션쇼는 어떻게 변화할까? ‘팩트’와 ‘픽션’ 사이에서 써내려간 네 편의 시나리오.

See Now Buy Live

패션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처럼 패션쇼 역시 시대를 반영하며 진화해왔다. 코코 샤넬과 이브 생 로랑이 살아 있을 무렵의 패션쇼는 충실한 VIP 고객을 위한 ‘살롱 쇼’였다. 장소는 주로 파리 고급 번화가에 있는 디자이너 매장이었고, 모델은 숫자가 적힌 막대를 들고 동선에 따라 고객 사이를 거닐었다. 컬렉션이 끝나면 이어진 피로연 자리에서 고객들은 모델이 입은 옷을 꼼꼼하게 보고, 디자이너를 축하하며 대화를 나누고, 주문을 위한 상담에 들어갔다. 맞춤복과 기성복의 분화, 유통과 세계 각국의 지사와 매장 등 패션이 체계적인 시스템을 이룩하기 이전 시대에 특화한 방식이었다.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패션쇼는 몇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파리, 런던, 뉴욕과 밀라노, 서울과 도쿄, 스톡홀름과 코펜하겐 등 ‘패션 위크’라는 이름 아래 1년에 두 번(혹은 남성복과 여성복을 분리하여 네 번) 컬렉션 기간을 지정하여 선보이는 방식은 통일된 기준이 되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시스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 그리고 모바일 문화의 등장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오프라인 매장에 방문하지 않고 모바일 웹사이트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소비하면서 변화는 한층 더 강렬해졌다. ‘지금 보고, 지금 산다(See Now Buy Now)’는 캐치프레이즈는 어떤 시대보다 빠르게 변하는 패션쇼와 소비자를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패션쇼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 굳이 SF 영화나 드라마를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동시대 다른 업계에서 펼쳐지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현실이 가까운 미래의 패션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과 글보다 짧은 동영상에 더 익숙한 젊은이들이 오랜 시간 집중하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는 바로 게임 전용 인터넷 개인 방송 서비스 ‘트위치(Twitch.tv)’다.

트위치에서 계정을 만들고 방송을 중계하는 스트리머들은 자신의 게임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같은 관심사와 취향을 공유하는 사용자들과 소통한다. 화려한 기술과 발상을 깨는 게임 플레이를 보고 감탄하는 사용자들의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게임 방송의 스타 플레이어들은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연예인처럼 일종의 공인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각자 ‘스트리밍 중간 광고’, ‘구독(Subscribe)’ 서비스, 아프리카 TV의 별풍선과 유사한 ‘응원(Cheer)’ 기능으로 수익을 낸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동영상 서비스는 유튜브이지만, 가장 많은 열성 사용자들이 거주하는 인터넷 방송국은 트위치가 되었다.(인터넷 트래픽 정보 제공 사이트 시밀러웹 기준 한 달 평균 5억 명 이상이 방문하며, 한국만 놓고 봐도 경쟁 상대 카카오TV의 열 배 규모이다).

라이브 스트리밍 컬렉션은 2018년 현재 하나의 ‘기본’이 되었다. 그런데 왜 상시 방송하는 트위치 스트리밍처럼 더 잘게 나눈 발매 일정 속에 실시간으로 상호 소통하며 구매로 이어지는 쇼는 없을까? 인력 부족부터 이미 정착한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문제가 클 것이다. 스트리밍 방송보다 소비 단위도 훨씬 높고, 하이패션이 보기에는 브랜드 가치를 낮추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한정판(이 역설적인 현실)을 구매하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 SNS에 리포스트하고, 고급 백화점이나 으리으리한 플래그십 매장뿐만 아니라 온라인 편집매장과 브랜드 웹사이트에서 새 제품을 예약·구매하여 집에서 편하게 받아보는 시대다. 10년 전만 해도 유럽 패션 하우스들은 온라인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회의적이었지만, 이제는 몇몇 패션 하우스를 빼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럭셔리 브랜드를 스마트폰에서 살 수 있다.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2017년을 휩쓴 ‘See Now Buy Now’의 미래는 결국, 찰나의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 ‘실시간 주문과 배송’, 수많은 ‘좋아요’,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대화형(인터랙티브) 컬렉션’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걸친 시제품이 아닌 판매 상품 완성과 촉박한 제작 일정처럼 그 안에 가로놓인 장벽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글/ 홍석우(패션 저널리스트)

The Metamorphosis of Runway

현대미술에서 전시는 구체적 작업을 감상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실은 작가의 개념적 여정을 파악하는 일시적 기착지(공항 같은)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그 장소가 미술관이건, 폐가건, 반지하건, 공간 그 자체의 성격보다는, 작가가 공간에 임베드(Embed)해놓은 프로토콜이 더 중요하다. 실험적 패션 디자이너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패션쇼를 변주하게 될 것이다. 특이한 공간에서 패션쇼를 여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고, ‘현대미술화’ 하는 패션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해, 쇼를 전개하는 방식과 쇼가 전개되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재규정하느냐, 해당 공간에 어떤 프로토콜을 임베드해 서로 상관없는 혹은 동떨어진 시공과 주체를 상호 연결해내느냐가 중요하다. 현재로선, 타임라인의 양태로 흐르는 시공에 대응하며, 2차 시장의 주역들과 상호 연동하는, 개념적(물리적) 연속체로서의 패션쇼를 재창안해낸 사람이 없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한 쇼의 재창안에 가장 근접한 사례는, 오프 화이트의 버질 아블로가 위대한 평론가 존 버거의 서거에 맞춰 기획했던 ‘사물 보기(Seeing Things)’ 프로젝트와 그 결과를 공개했던 오프 화이트의 2017 F/W 런웨이일 것이다. 당시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버질 아블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의) 에토스는 젊음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위치에서 입을 수 있는 뭔가를, 젊음엔 나이가 없다는 탐구적 사고를 발휘하며, 구세대로부터 취해 제시하는 것이어야 했다.” 버질 아블로가 존 버거의 죽음을 참조적으로 전유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새로이 갱신해낸 방식은, 다소 얄팍했지만, 그의 전략과 화술이 실험적 현대미술가들의 그것을 쏙 빼닮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2014~2015년 이후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새로운 미래를 본다. 카니예 웨스트나 버질 아블로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의해 재매개되는 세계에 최적화한 첫 번째 모델을 제시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큐레이팅-프로듀서, 사업-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타임라인의 양태로 흐르는 세계, 즉 새로이 재매개된 스트리트 컬처의 트렌드와 채널링하며, ‘라이프스타일 레이어’를 임베드한 아이템을 창조해내는 그들의 능력은, 기존 디자이너들의 그것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특정 요소를 아이템에 구현하기 위해 그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매시업이나 피처링 등 음악 산업의 프로토콜에 가깝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미술가가 구사해온 개념적 재맥락화와 위계적 협업의 전략과 동일하기도 하다.

글/ 임근준(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이 글은 2018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현대미술가 Sasa[44]의 신작 프로젝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Dear Rei Kawakubo

지금의 쇼는 어떻게든 런웨이를 벗어나려 한다. 작년 가을 랄프 로렌은 자신의 차고에서 쇼를 펼쳤고, 마르지엘라는 아틀리에에서 쇼를 열었으며, 알렉산더 왕은 뉴욕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쇼를 선보였다. 이는 곧 패션이 클리셰를 벗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언어와 로직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것을 은유한다. 차이를 인정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그 모든 섹슈얼리티가 그저 사람이란 영역 안에 존재한다. 기무라 이헤이 상을 수상한 사진가 모리 에이키가 지난해 선보인 전시 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온통 빨간 세계로 도배하며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지나 포스트 휴머니티로 향했다. 그리고 이는 요지 야마모토와 함께 여성을 섹슈얼리티의 기반 밖으로 위치시켰던 레이 가와쿠보의 옷들과 닿아 있다. 여기서 레이와 모리가 만난다. 레이의 패션엔 항상 ‘Extra’가 있었고, 모든 이념과 개념 너머는 ‘Beyond Human’이다.

‘Art of the In-Between.’ 지난해 5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는 레이 가와쿠보의 여성복 150벌을 선보이며 이렇게 이름 지었다. 레이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패션을 데려다 놓으며 예술의 어느 순간과 마주한다. 재킷에 재킷을 얹어 확장하는 시공간의 재구성, 팬츠가 재킷을 만나 코트가 되거나 바지가 바지를 벗고 스커트를 입는 새로운 탄생, 그리고 무수히 많은 레이어와 입체의 축적으로 발생하는 기이한 차원. 1981년 파리 데뷔 쇼로 기존의 모든 것들에 반대(Anti-establishment)를 외쳤듯 애초에 레이의 패션은 패션 그 이상이었다. 내게 미래는 여기가 아닌 어디, 지금이 아닌 언젠가고, 동시에 레이 가와쿠보다. 그에게 보내는 가상의 쇼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무대의 시작은 피나의 작품 <만월(Vollmond)>에서 가져온다. 모리 에이키의 필터를 반영해 레이의 무대가 빨갛게 빛난다. 무대 위로는 물이 흐르고 그렇게 형성된 물결이 멜랑콜리의 판타지를 싣고 온다. 비요크의 앨범 의 ‘The Gate’가 시작된다. 몽환적인 목소리가 시간을 이탈하고, ‘지금’, ‘여기’를 벗어나 울려 퍼진다. 독보적이고 그 어떤 것보다 앞서 있는 것. 레이와 비요크를 수사하는 말임과 동시에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비요크는 레이를 두고 “타인과 분리된 영역에서 고유한 자리를 지키고, 그렇게 용감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영역이 미래의 다른 말로 읽힌다. 무대를 감싼 아치 형태의 스크린에 피나의 춤 영상이 흐른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빨간 메이크업으로 가린 모델들은 워킹을 하지 않고 마치 무용수처럼 등장해 물결과 어울린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고 서로를 향해 셔터를 누른 뒤 다른 모델에게 전해준다. 워킹은 그렇게 발생한다. ‘훔쳐보기와 카피(Peeping & Copy)’조차 패션을 구성하는 요소가 됐음을 비꼬듯 은유한다.

남자 모델과 여자 모델이 뒤섞여 등장한다. 남성복과 여성복 역시 뒤섞인다. 남녀남녀도 여남여남도 아니다. 모델들은 퇴장하지 않는다. 그대로 머물러 차이를 연기한다.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쇼와 일상이라는 차이, 그리고 현실과 예술이라는 차이. 무대 위를 흐르는 물이, 모리의 빨간 필터가 이 모든 차이를 지워낸다. 비요크가 ‘Care For You’라 노래하는 대목에서 모델들이 흔들린다. 마치 바람이 나무를 스쳐가듯, 드뷔시의 ‘달빛’이 흐르는 기요시 영화에서 커튼이 흔들리듯, 그리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예감하듯. 이내 무대는 모델들로 가득 찬다. 노래가 또 다른 비요크의 곡 ‘Blissing Me’로 바뀌고 모델들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진열을 꾸린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사각형이다. 마치 피나의 작품을 모리의 프레임이 담아낸 사진 같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맨 앞 가운데 모델을 비춘다. 우람한 팔 근육이 도드라진 상체와 곱게 떨어지는 원피스. 작년 레이 가와쿠보의 컬렉션에서 선보인 과도한 볼륨의 오버 재킷이 근육질 남자의 상체로 변주된다. 음악이 사라지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다. 남자와 여자가 떨어진다. 모델들의 얼굴을 비추는 빛만이 빨갛게 흘러간다. 이것이 레이의 어느 미래의 컬렉션 마지막 착장이다. 차이가 혼재하는 모리의 세계, 무수히 많은 덧셈으로 복식을 외연으로 확장한 레이의 세계가 비탄의 끝에 스며 나오는 비요크의 선율에 녹아든다. 레드로 수렴된 차이는 레이의 컬러 블랙 곁에 자리하고, 그렇게 패션은 사진이기도 하고 사진은 패션이기도 하며 그 어느 것도 춤이 될 수 있는 세계로 확장한다. 물이 흐르는 바닥에 조명이 글씨를 쓴다. ‘The Only Integrity.’

글/ 정재혁(칼럼니스트)

Back To The 18th Century

부끄럽지만 패션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몇 번 없다. 구글한테 물어보니 패션쇼는 짧게는 7분에서 길게는 20분 사이로 진행된다고 한다. 길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 예고편은 2분 남짓이다. 광고는 길어야 30초, 히트송의 길이는 5분을 넘기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 시대에 한 시간 남짓한 포르노를 끝까지 보는 고지식한 남성들은 없을 것이다. 영화관에 두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은 고문이요, 세 시간짜리 디너 만찬은 지옥이다. 띄워놓은 대여섯 개의 모바일 창과 헨리 제임스의 길고 긴 소설, 잡지 <와이어드>의 중국 특집기사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쯤 발명될 것인가 망상에 잠기곤 하는 나의 동영상 인내심 한계는 에피소드당 30분 미만, 한 시즌당 10개 미만의 영국산 시트콤이라 믿어왔는데 최근 뮤직비디오 한 편조차 끝내지 못하는 한심한 나를 발견했다. 이제 나는 움직이는 이미지라면 이런저런 웃긴 짤들, 혹은 영화 예고편 정도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나의 상태를 지구상의 누구보다도 패션쇼에 앉아 있는 셀렙들, 혹은 패션계 관련 인사들이 깊이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아님 말고. 인간들이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그저 걸어 나와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수십 번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초단기화된 현대인간의 집중력에 근거해봤을 때 무리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왜 다들 걸어 나와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걸까? 물론 이따금 특이한 쇼들이 있지만 공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사디스틱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박적인 미니멀함을 추구하는 무대 위에서, 일반인으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수준의 여러 가지 옷차림을 펼쳐놓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특이한 옷들은 거의 다 과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식의 크리에이티비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다이즘을 연상케 하는 최근의 눈뜨고 못 봐주게 못생긴 패션 트랜드는 모던 패션이 그야말로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미래의 쇼에서는 스마트한, 아니 어정쩡한 믹스 매치 전략을 집어치우고 차라리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샤넬의 2014년 가을 패션쇼가 그 힌트다. 알록달록한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한 그 멋진 쇼는 기 드보르와 장 뤽 고다르가 애증 속에 바라보던, 전쟁의 폐허 속에서 화려하게 탄생한 쇼핑몰 자본주의 무대로서의 20세기 파리를 무대로 끌어왔다. 시대착오적인 무대를 가득 채운 모조 파리지앵들이 앙증맞은 샤넬 백을 어깨에 건 채 서성이는 것은 정말이지 퇴폐적인 볼거리였다.

적극적으로 퇴폐를 탐하자. 다만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산 마르코 대성당이 바라다보이는 베네치아의 한 노천 카페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리는 멋진 세 남녀. 대성당 너머로 천천히 해가 가라앉는 사이, 카페 주위로 부산하게 사람들이 오간다. 문득 여자가 두 남자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미친 과학자가 신 과학기술을 이용해 괴물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이야기에 홀딱 빠져든 두 남자는 물론 퍼시 셸리와 바이런. 의상은 마가렛 호웰, 쇼는 이백오십초 안에 끝낼 것.

글/ 김사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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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일러스트 Dohun Kim
출처
4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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