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스스로 코미디언이 되기로 한 두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마음껏 웃기고 마음대로 웃는 여성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하자는 연락을 받은 건 멜버른에서였다. 지긋지긋한 한국의 겨울을 피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개월이라는 시간을 여행자도 생활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보내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획을 함께 하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메일 속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이나 님은 Matt돼지 님(팟캐스트 <독일 언니들>, <영혼의 노숙자> 진행자, 이하 맷 님)과 함께 코미디언으로 섭외할 예정이고요.” 스탠드업 코미디언? 내가?

메일을 닫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에이미 폴러의 책 <예스 플리즈> 전자책을 열고, 밑줄 친 부분을 쭉 읽어보았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작가로서, 여성으로서 사는 삶에 대한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 목소리를 연기한 사람다운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좌우명은 ‘재능 있는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하자’였다.” 이 쇼는 재능 있는 친구들의 기획이다. 그리고 웃기는 일이라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은 종류의 일이다. 무대에서라면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다르면 뭐가 또 어떻단 말인가. 잘해내기만 한다면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일이 될 텐데. 그래서 답장을 보냈다. 작가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면 왜 안 돼? 예스, 플리즈! 제가 하겠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웃긴 작가다. 스스로의 유머 감각에 대해 프로 의식이라고 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당연히 나의 정체성은 말하고 무대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까 무대 위의 나는 사실 관객과 대중에게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다행인 점은 바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원래 코미디언보다는 작가의 영역이다. 정확하게는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자신의 코미디를 자신이 쓰는 사람의 무대다. 그렇다면 내가 무대에 서는 게 왜 안 되는가? 나는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나 자신을 이렇게 설득한 뒤, 대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책도 쓰고 드라마도 쓰고 인터뷰 대본도 쓰고 칼럼도 쓰고 에세이도 쓰는 12년 차 작가의, 첫 스탠드업 코미디 대본이었다.

첫 주제는 바로 여성과 섹스. 나는 오르가슴 탐구와 자위로 주제를 더욱 좁혀 잡았다. 주인공은 흡입식 여성 자위 기구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섹스토이였다. 제목은 주제를 정하자마자 바로 나왔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기계는 어떻게 인간을 이기는가? : 새티스파이어를 아십니까?’ 우선 내 일상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에피소드들을 모았다. 그 다음 순서는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30분짜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어떻게? 나에게는 최고의 롤모델 앨리 웡이 있었다. 그가 임신 7개월이 넘은 배를 끌어안고 웃긴 아시안 미국인 여성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때면 언제나 모니터 너머에서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쇼를 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고 배우이며 동시에 시트콤 작가인 그의 쇼를 다시 보며 꼼꼼히 구성을 체크하고, 역시 작가라면 저 정도는 웃겨줘야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충전한 뒤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전설의 금서에서 세계 문학 반열에 오른 <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시작해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섹스토이로 오르가슴을 경험한 뒤, 4차 산업혁명이 바로 우리 앞에 와 있음을 믿게 된 이야기였다. 

이렇게 쓰면 ‘뭐 저런 미친 이야기가 다 있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사실 미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말 웃긴 이야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대본을 쓴 뒤 일주일 내내 방에 홀로 앉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고독한 연습이 이어졌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꿈을 품고 7년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한 맷 님의 무기가 열정이라면, 나의 무기는 프로 의식이다. 매일 저녁 연습 후 예상 공연 시간을 알리는 내게, 기획팀의 동료가 말했다. “이나 님, <나 혼자 산다> 나왔던 최강창민 같아요.” 일어 공부를 조금만 해볼까 하고 자리에 앉았다가 한 시즌을 필기하며 보는 15년 차 현역 아이돌처럼, 뜨거운 열정 대신 프로의 성실함으로. 적어도 관객들이 입장료를 아까워하지는 않도록.

관객은 60여 명. 청계천 변 공장과 공업사들 사이 미심쩍은 곳에 있는 바에서 <래프 라우더> 쇼의 첫 막이 올랐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 걸맞게 반짝이는 금커튼을 달아둔 작은 무대에서 나는 데뷔라는 것을 했다. 언제나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나이가 몇 살이든 데뷔라는 걸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작은 규모였지만 12시간 만에 매진되어 지인들도 표를 구하지 못할 정도의 관심을 받았고, 두세 군데의 매체에서도 취재를 나온 상황이었다. 의외로 별로 떨리지는 않았다. 아마추어 뮤지컬이었지만 배우로 무대에 서본 경험도 있었고, 이미 내 안에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플로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공연에 온 사람들은 ‘얼마나 웃기나 보자’고 팔짱을 끼고 있는 비평가가 아니라, ‘마음껏 웃어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온 너그러운 관객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무대를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내어준 사람들이었다. 

기획팀과 언젠가 ‘여성의 욕망’을 검색하면 오직 남성의 시각으로 본 여성의 육체만 나온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준비한 이야기였다. 여성이 스스로 찾고 알아가는 쾌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클리토리스보다 나팔관의 위치를 먼저 알았던 우리의 과거를 말할 때, 내 몸을 내가 알아가는 기쁨을 묘사할 때 관객들은 크게 웃었다. 비록 내 순서가 끝나자마자 떨어진 당을 도넛으로 채워야 했지만, 사석이 아닌 무대에서 마이크를 들고 마음껏 웃기는 경험이 내 안의 무언가를 바꾸어놓은 것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마 차차 알게 되겠지. ‘어떤 사고도 없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무사히, 그리고 <래프 라우더>라는 이름에 걸맞게 크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공연을 마쳤다. 이 작은 쇼가 왜 시작됐고 또 왜 이어져야 하는지는 막을 내리며 황효진 기획자가 했던 말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때까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울면서밖에 할 수 없었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웃으면서 같이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송은이가 여성 예능인 상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 뛰어난 코미디언이 상을 받기까지 2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스스로 기획자이자 제작자가 되어 판을 벌이고, 그 판이 기존 방송 구조의 바깥에서 인기를 얻은 뒤에야 다시 시스템 안에서 인정을 받게 된 송은이가 말했다. “놀이터에서 혼자 놀면 재미없잖아요. 가능한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놀고 싶어요. 판을 벌이고 싶고요.” <래프 라우더> 역시 시스템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판을 벌여 시작한 쇼다. 기존의 방송과 큰 상관도 없고 그들의 인정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 코미디언이 되기로 한 두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은 판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마음껏 웃기고 마음대로 웃는 여성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라는 말에 걸맞게 마음껏 웃기며 마음대로 이어갈 예정이다. 그러니 어디선가 이 쇼의 이름을 보게 된다면, 이 점을 기억해주길. 거기서는 불편함 없이, 마음대로, 아주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다고. 그리고 거기엔 언제나 함께 웃어주는 여자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작은 놀이터에서 마저 잘 놀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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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윤이나(칼럼니스트)
사진 Getty Images
출처
5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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