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이유

이유는 간단하다. 하루가 끔찍하게 바쁘고 숨 막히게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읽어야만 한다.

1990년대의 한 비디오 인터뷰에서 아이슬란드의 뮤지션 비요크(Bjork)는 이렇게 말했다. “한 시인이 TV를 보는 것이 얼마나 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말해준 적이 있어요. 과도한 이미지가 뇌에 전달되면서 과부하를 받게 된다고요.” 그래서 그녀는 TV를 직접 분해했다. 픽셀과 부품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아낸 후 비요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게 바로 과학적 진리입니다. 시보다 훨씬 나은 것이죠. 시인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세상에! 런던에 살고 있는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인 내게 이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비요크는 정말이지 신적인 존재이고 특히나 내게 그녀는 메시아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불온하게도) 비요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시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절대적으로 허락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 시를 읽느냐고? 이토록 재미없고 애매모호한 단어들(즉, 거짓말)의 나열을? 그것도 소셜미디어와 스트리밍, 쉽고 얕은 지식이 곧 진리인 이 시대에? 나도 잘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난 지금이야말로 ‘시의 필요성’을 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그런 종류의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시를 위한 곳이 없거나 시가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면, 아마 시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내 말을 비웃기 전에 당신의 일상을 돌아보자. 끊임없이 울려대는 메시지와 메일, 산더미처럼 쌓인 진절머리 나는 업무들, 모니터를 보는 척하면서 떠올린 탈출에 관한 공상들벌써부터 내일이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나?  

시가 줄 수 있는 보상은  새롭고, 사적이며,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가 아주 거창한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읽을 만하고, 믿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나?

한동안 우리는 빠르고, 강하고, 크고, 대담한 것만이 미덕이라는 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열심히 놀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노는 것과 일 모두 가치가 없다는 생각 말이다. 하물며 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힙하다는 트렌드까지 등장했으니, 세상은 충분히 미쳤다. 당연하게도 한동안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요가를 배우고, 좁아터진 선반 위에 화분을 놓고, 채식주의와 자연주의를 표방하면서.    

“조금만 느리게 살아봐. 그럼 이 지긋지긋한 일상도 괜찮아질 거야.”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인 이 문장을 슬로건으로 하는 ‘슬로 리빙(Slow Living)’은 일종의 시대적인 반작용이며 해독제다. 오전 10시에 벌써 네 잔째 커피를 들이켜고 있는 우리에게 ‘슬로 리빙’이란 더없이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묻고 싶은 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느리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나는 그 답을 구글에서 찾기로 했다. ‘슬로 리빙’에 대해 검색해서 첫 페이지 10개의 글을 읽어봤다. 다음은 ‘슬로 리빙’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그들의 몇 가지 제안이다. 

1. 등산한다.(나를 포함한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항목이다. 난 등산을 좋아하지만, 사무실로부터 반경 200km 안에는 산이 전혀 없다.)

2. 데이트.(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판단받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가 또 있을까?)

3. 15분 일찍 도착한다.(나에게 이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슬로 리빙’ 같은 건 검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4. 하루를 마치면서 소소한 일을 하나 한다.(어떤 것? 이 불면의 시대에 느리게 살기 위해 기본적인 신체 기능조차 거부해야 하나?)

5. 구두를 닦는다.(내가 지어낸 게 아니다.)

6. 명상한다.

이렇듯 ‘슬로 리빙’은 불투명한 개념이지만 6번 항목에 대해서는 제법 얘기해볼 가치가 있다. 나는 불교도 친구인 찰리의 초대로 처음 명상을 접했다. 그는 불교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바꾸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보증했다. 세상 대부분의 것에 냉소적인 나조차도, 명상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는데도 말이다. 30년이 넘도록 호흡을 하며 살아왔지만, 아직 기본 호흡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명상은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난잡한 마음의 파동을 고요하게 만드는 데는 꽤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무언가를 쓰는 일의 반은 읽는 것이기 때문에, 그날도 시를 써 내려가기 전에 의식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 좀 달랐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시를 읽으면서 명상 클래스에서 느꼈던 한없이 ‘고요한 상태’를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때보다 더욱 명료했다. 명상을 하는 동안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비우는 것에서 나아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상태’ 역시 시를 읽으면서는 도달할 수 있었다. 시와 명상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같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아냈다. 생각과 단어, 아이디어를 마주하고 흐르는 대로 놓아주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끔찍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나의 결론은 바로 다음과 같다.

7. 제발 시를 읽도록 하자. 

꼭 훌륭한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즉 내가 쓴 시도 괜찮다는 얘기다.) 물론 시는 음식이나 섹스, 인스타그램을 접할 때만큼 즉각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멈추고, 시작하고, 다시 멈추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때로는 책을 덮고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야?’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고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봐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어떤 시는 좋을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갑자기 시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하지만 그건 내 분야이니까, 공손히 물러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일상의 새로운 공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새롭고, 사적이며,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곳. 이 열린 세상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동의하고, 비난하고, 웃고, 울고, 뭐든 좋다. 시가 아주 거창한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해방과 자유가 보장된 일상의 틈을 만들어준다면 읽을 만하고 믿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나? 게다가 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불가해한 것도 아니다.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신이 하루에 열 번 이상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뭔가에 빗대어 빈정거릴 때마다 복잡한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의 작동원리 또한 본능적인 것에 가깝다. 다만 시의 결과는 늘 웃음으로 끝나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에 꽤 소질이 있지 않나? 당신이 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다.  글/ David Nash(시인) 번역/ 채원식 프리랜스 에디터/ 권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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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랜서 에디터 권민지
David Nash(시인)
번역 채원식
일러스트 Ignacio Ortega
출처
5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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