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 ‘꽃의 맛’

아주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꽃에도 맛과 향이 존재한다. 어느 봄날의 식용꽃 레시피 채집기.

허기진 날들의 연속이다. 식욕을 억제하겠다고 약을 먹고, 금지 음식 앞에서 동공이 흔들리며, 늦은 저녁 24시간 편의점에서 칼로리와 영양 성분을 정독해서 고민 끝에 고른 음식은 고작 노란 반숙 달걀과 바나나 정도. 두 달 동안 겸허하게 반복하고 있는 요즘의 루틴. 그날도 바싹 마른 채소를 입에 구겨 넣고 늦은 저녁 극장으로 향했다. 고양이가 모래를 헤집듯 얼음이 뽀얗게 쌓인 눈밭에서 배추를 캐낸 김태리(혜원 역)가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일 때부터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꽁꽁 얼었을 땐 수제비, 땀 뺀 후에 마시는 막걸리와 부침개, 머리 감고 선풍기 앞에서 먹는 콩국수, 가을이 깊어지면 더 맛있어지는 밤조림.

그중에서도 맛봉오리를 확 피어오르게 만든 결정적 순간은 봄에 꽃을 먹던 장면.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위에 하얀 꽃이 와르르 쏟아지면 김태리가 야무지게 포크로 면과 함께 돌돌 말아 입에 넣는다. 여름이 오면 아카시아 꽃을 통째로 튀긴 다음 부엌에 서서 와사삭 깨물어 먹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내게 남긴 건 ‘꽃의 맛’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맛, 억눌려 있던 식욕을 풀어 헤치는 해방의 맛, 자기파괴적인 기이한 식습관을 되돌아보는 소생의 맛. 스트레스 지수가 높을 때 먹는 기괴한 음식을 떠올려보면 접시 위에 올라간 꽃은 그게 뭐라도 아름답지 않은가.

식용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연남동에 있는 실험적인 요리 창작소 ‘아까 H’다. 이현승 셰프는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계절마다 개성 있는 식재료를 받아 건강한 이탤리언 요리를 만든다. 그녀의 폴더엔 이미 다채로운 꽃 요리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제비꽃을 올린 버터 & 엔초비 부르게스타, 배추꽃으로 만든 페스토 파스타, 아카시아 장아찌를 올린 고등어 오일 파스타, 머위 꽃잎을 튀겨서 만든 야채 텐동까지. 채소를 손질하다 우연히 얻어 걸린 선물 같은 꽃부터 마르쉐 장터에서 구한 이색적인 꽃들로 만든 요리들이 구미를 당겼다. “4월쯤 마르쉐에 나가보면 직접 기른 꽃들을 가지고 나온 농부들을 만날 수 있어요. 봄철 아주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죠. 메뉴로 올리기엔 꽃의 양이 적어서 주로 스텝밀로 요리해서 먹었어요.” 앉은뱅이 우리밀로 직접 만든 생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귀가 듬뿍 들어간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그 위에 셰프가 채심 몇 송이를 솔솔 뿌려주었다. 영화 속 그 장면을 떠올리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열매가 열리는 곳엔 언제나 꽃이 피고 진다”고 셰프가 말했다. 사과꽃, 딸기꽃, 바나나꽃, 호박꽃, 돼지감자꽃, 오이꽃. 셰프가 불러준 꽃 이름 하나하나를 흰 종이에 적었다. 활짝 피지 않은, 움츠린 주키니(호박의 일종)꽃 안에 리코타 치즈를 채우고 오븐에 굽거나 튀겨서 먹는 요리는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별미다. 청담동의 뚜또베네나 그라노와 같은 연륜 있는 클래식한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도 초여름 무렵 노란 주키니꽃을 사용한 요리를 선보이곤 했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내게 남긴 건 ‘꽃의 맛’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맛, 억눌려 있던 식욕을 풀어 헤치는 해방의 맛, 자기파괴적인 기이한 식습관을 되돌아보는 소생의 맛.

사실 먹는 꽃은 먼곳에 있지 않다.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케이퍼, 아티초크와 같은 친숙한 식재료들은 꽃이 피는 머리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꽃시장에 가면 볼 수 있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잎을 한 아름 따다 먹는 것. 어쩌면 거기서부터 환상이 시작된 것 같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과 함께 촬영이 끝난 후 아름다운 꽃잎을 잘근잘근 씹어보았다. 팬지, 금어초, 소국화, 양란…. 그녀가 정성스럽게 적어놓은 이름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하지만 곧장 쓰레기통으로 달려가야 했다. 미처 다 씹지도 못한 채 ‘퉤’ 하고 그것들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벨벳을 씹은 듯 텁텁한 식감, 무의 상태에 가까운 맹맛, 끈적이는 점액. 먹는 꽃은 아직은 미지의 영역, 너무 아방가르드하게 느껴졌다. 샐러드에 우아하게 뿌려 먹고 실험적으로 에어프라이어에 튀겨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흐지부지된 채로, 꽃은 그렇게 아직도 냉장고에서 말라가는 중이다.

한때 미국에서는 꽃을 색종이 가루처럼 흩뿌리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식용꽃은 2018년 미국 홀푸드마켓이 예측한 푸드 트렌드 중 하나다. 꽃을 먹는 건 동양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1670년 동아시아 최초로 여성이 쓴 요리책 <음식디미방>에도 나와 있다. 정갈하게 꽃을 수놓은 전통 음식 화전 위에는 진달래뿐만 아니라 맨드라미, 복숭아꽃, 백합꽃, 옥잠화 등 계절마다 피는 온갖 꽃들이 올라간다. 요즘 미세먼지 농도를 생각한다면 길가에 핀 꽃을 뜯어다 요리하는 건 낭만보다 공포에 가깝지만 누구에게나 꽃을 따다 입가에 가져가본 경험은 한번쯤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꽃을 먹을 수 있고 먹으면 안 되는지, 꽃의 맛과 향은 어떻게 분류되는 것인지 정리된 액셀 파일을 갖고 싶다는 것이 어느 푸디의 작은 소망. 꽃의 역사와 생태, 그 아름다움과 쓸모에 관한 책 <꽃을 읽다>에 따르면 “식용 가능한 꽃의 맛은 무미한 것에서부터 달콤하고 매콤하며 얼얼한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먹었을 때 몸에 독이 되고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아프게 하는 꽃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음 호명하는 꽃들은 부디 눈으로만 바라볼 것. 수선화, 칼라, 아네모네, 히아신스, 아이리스, 수국, 은방울꽃, 나팔꽃. 독성이 심한 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선정한 ‘식용 가능한 꽃 TOP 10’ 가운데 몇 가지를 발췌해본다.

1. 금잔화는 국화과 식물로 약간 쓴맛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사프란을 대체하는 식물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쌀밥, 감자, 케이크 등에 사용할 수 있다.

2. 한련의 꽃잎은 요리에 매콤한 후추 같은 맛을 낸다. 둥그스름한 잎도 식용하는데 식초, 샐러드용 드레싱인 비네그레트(Vinaigrette), 생선 요리에 잘 어울리는 뵈르 블랑 같은 소스에도 사용할 수 있다.

3. 제비꽃은 파스타나 감자샐러드, 그리고 짙은 색깔의 시럽에 풍미를 더하는 완벽한 첨가제다.

식용꽃이라도 어떻게 관리되고 재배되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건 이 책뿐만 아니라 송훈 셰프의 조언이기도 했다. “강원도에 위치한 ‘해오름영농조합’에서 유기농 식용꽃을 구입해서 요리에 사용하고 있어요. 길가 혹은 야생에서 핀 꽃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건 지양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한남동에 ‘더훈’이란 레스토랑을 오픈한 그는 요즘 식용꽃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있다. “꽃을 요리에 사용하면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샐러드에 올리면 기분 좋은 산도를 즐길 수 있어요.” ‘더훈’의 콥 샐러드에는 아보카도, 치즈와 함께 구름패랭이꽃이 올라간다. “지금 마늘꽃이 딱 피는 시기예요. 마늘꽃에는 매콤하고 쌉쌀한 향이 짙게 배어 있는데 오일과 함께 볶아서 타파스나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만들어도 좋죠. 로즈메리에서 피는 보라색 꽃도 고기 요리 위에 얹으면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은은하게 허브 향이 느껴지죠.” 꽃은 ‘셰프의 킥’이다.

식용꽃 만찬을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디저트 타임이다. 인스타그램(@zenzero126)으로 계절의 맛을 알리는 ‘젠제로’는 생강우유, 잣, 이화백주, 조선 향미, 밤꿀과 고르곤졸라 등 특징이 명확한 재료를 그윽하게 표현해내는 젤라토 가게다. 특히 ‘로즈 페탈’이라는 메뉴는 장미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맛이랄까. 젤라토의 색깔도 장미 특유의 붉은색이 아닌 미색에 가깝다. 향수나 화장품처럼 인공적인 향으로 후각에 각인된 장미의 캐릭터를 우아하고 직접적이지 않게 표현했다. 부드러운 텍스처 속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장미의 아로마를 천천히 음미하는 일. 가장 느긋하고 은밀하게 꽃을 먹는 방법이다.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사진 Park Jaeyong
푸드 스타일링 김 보선
어시스턴트 전 윤정
출처
47670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