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의 미학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만이 가진 고유의 미덕이 있다. 매일매일 마주해서 특별할 것 없다고 여겼던 아주 일상적인 식재료의 이면을 찾아 나섰다.

얼마전 영화 <봄날은 간다>의 속편이 제작된다는 기사가 반짝 화제를 모았다. 결국 두 배우가 나서서 아직 구체화된 것은 없고 그저 감독과 안부 인사를 나누던 중 오간 이야기라고 공식 발표까지 하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분기별로 가끔 돌려 보는 이 영화가 결국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라면 한 그릇 아니었나? (내가 아는 어느 커플은 이 스토리에 영감을 받아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귀여운 입간판을 문 앞에 놓은 라면 레스토랑을 개업했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에서 좋아했던 장면은 ‘밥’이다. 어느 시골집 할머니네 작은 방에서 두 남녀가 수북이 쌓아 올린 고봉밥을 받아 들고 일동 정적이 흐르던 장면. 넘어야 할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유지태가 먼저 한 수저 크게 떠서 밥을 김에 ‘콕’ 하고 찍어 먹으면, 이영애도 손으로 숟가락을 꽉 쥐고 삽으로 흙을 뜨듯 밥을 씩씩하게 퍼 먹는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러니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김홍도의 ‘새참’ 그림에 그려져 있을 법한 ‘거대한 밥’이라는 구시대 유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지은 밥 한 그릇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엄마의 따뜻한 정성’이니 뭐니 하는 말도 전근대적 프레임이다. 얼마든지 제 손으로 뜨끈한 밥을 2분 만에 차려 먹을 수 있는 즉석 세상 아닌가. 지난 12월 CJ제일제당은 올해 즉석밥 ‘햇반’ 판매량이 처음으로 3억 개를 돌파했다고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누적 판매량은 20억 개. 1996년 국내 처음 비상식량 컨셉트로 등장했던 즉석밥은 어느새 그 종류만도 29가지에 다다른다. 최근에는 식후혈당에 도움을 주는 밥이나 저단백밥과 같은 기능성 제품까지 선보였다. 줄곧 ‘밥은 그저 도울 뿐’, ‘밥이 그냥 밥이지 뭐’ 하며 쌀을 평가절하했던 나 같은 사람들은 생각을 전환해볼 필요가 있다.

시선을 잠시 주방으로 돌려보자. 쌀의 존재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리사들이 있다. 2년 연속 미쉐린 3스타를 받은 서울신라호텔의 한식당 라연은 햅쌀의 출하 시기인 매해 11월 찰기, 윤기, 맛, 식감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쌀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올해는 고시히카리 품종으로 재배하는 김포의 금쌀이 낙점됐다. “수분, 영양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쌀을 사용하기 직전에 직접 도정하여 밥을 짓는다”고 김성일 책임 주방장은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쌀과 요리와의 궁합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셰프도 있다. 지중해, 동남아, 인도, 중동 등 향신료라는 신세계를 자유롭게 펼쳐 보이는 레스토랑 사직동 주반은 쌀이 가진 고유의 향과 맛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 이를테면 커리에 제공하는 쌀에도 마리아주를 적용했다. “종의 다양성 측면에서 일본쌀, 토종쌀, 개량한 품종 등 이런저런 쌀을 많이 먹어봤어요. 정확하게는 ‘골드퀸 3호’라는 명칭이고 ‘월향미’로 더 쉽게 알려진 이 쌀로 밥을 지어보면 특유의 옥수수 냄새가 강하게 나거든요. 저희가 내놓는 향신료 강한 음식들과 굉장히 잘 어울리기 때문에 월향미를 공깃밥으로 사용합니다.” 평소 틈날 때마다 국내로 해외로 식재료 여행을 부지런히 다니는 김태윤 셰프가 말했다.

쌀을 잘 알지 못하는 나의 탐구심을 발동시킨 작은 가게가 있다. 마포구청역 근처 주택가 골목길에 자리 잡은 동네정미소(@local_jungmiso)는 이제 막 새로 생긴 공간이다. 매일 인스타그램에 ‘항공샷’으로 찍은 정갈한 상차림 사진이 올라온다. 날마다 바뀌는 여러 가지 반찬과 국은 여느 식당과 다를 것 없지만, 주인공은 밥이다. 사진과 함께 “오늘의 쌀: 신동진(전북 김제 박충식 농부님), 도정일: 2017년 12월 15일”이란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매섭게 바람이 불던 날 멀리서도 보이는 귀여운 서체의 ‘米’ 간판 덕에 길을 잘 찾았다. 문을 열자 구수한 숭늉의 향과 함께 매장 한가운데 놓인 흰색 도정기가 보였다. 주문한 오늘의 밥상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직원이 말했다. “여기 있는 밥은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하이아미라는 쌀이에요.” 하얗고 오밀조밀한 쌀밥이 꼭 알약처럼 느껴졌다. 이름 그대로 ‘높다’는 뜻의 영단어(High)와 아미노산의 합성어였다. 동네정미소 벽에는 ‘대동 벼지도’가 붙어 있고 조금씩 사다가 맛볼 수 있는 일반쌀과 토종쌀이 일렬종대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진열대에서 ‘우보농장’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여기서 잠시, 공간을 다시 서울혁신파크로 돌려본다. 이날은 2017 식문화 혁신 어워즈가 열렸던 날이다. 수상패를 전달받은 이근이 농부는 멋쩍게 말했다. “사실 저는 짝퉁 농부입니다. 씨앗도 모르고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죠. 막걸리와 삼겹살에 곁들여 먹을 상추를 좀 심어보려고 5평 텃밭을 얻었던 게 시작이었어요. 그러다 요즘은 거의 단절된 할머님들의 전통 농사법을 보게 됐습니다. 그분들은 씨앗을 사지 않고 똥과 오줌을 거름 삼아 순환하는 농사를 지으시더군요. 지속가능한 그분들의 삶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명의식보다는 벼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13년차 도시 농부이자 ‘우보농장’의 대표로 고양시 벽제동에서 토종벼 농사를 짓고 있다.

사실 토종쌀이 인터넷 기사에 심심치 않게 이름을 올린 건 미국 대통령께서 잡수셨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방한 기념 만찬에 우보농장의 대표적인 네 가지 쌀로 지은 돌솥밥이 등장했다. “북흑조와 흑갱은 주로 북한 지방에서 심었던 품종이고, 자광도와 충북흑미는 남한에서 잘 자라는 품종이죠. 사실 이 품종을 추천한 이유는 남북화합의 차원에서 네 가지 쌀을 섞는다는 의미가 있었어요. 뭐 트럼프야 그 숨은 뜻을 당연히 모르고 먹었겠지만요.(웃음)” 검게 그을린 피부와 새까맣게 물든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제 아내가 그렇게 말합니다. 저보고 종자의 조종을 받는다고요. 일제시대 문서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 고유의 쌀 품종이 1천4백51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남이든 북이든 각 지역 땅에 맞는 품종이 있었어요. 맛의 다양성을 느껴보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지난가을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린 <먹는 게 예술이다. 쌀>은 ‘벼’라는 식물이 가진 아름다움과 맛을 농부, 예술가, 학자, 요리사 등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한 흥미로운 프로젝트였다. 이근이 농부는 벼가 가진 미(美)에 대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흔히 황금들녁이란 표현을 쓰는데, 직접 와보면 아닙니다. 화도라는 품종은 심어놓으면 꼭 논에 불이 붙은 것처럼 빨갛게 보여요. 북흑조의 벼 이삭은 검은색인데 북방의 강인함을 가져서 성격 자체도 거칠고 묵직하고 잘 쓰러지지도 않죠. 아무튼 북흑조는 멋있는 품종이라서 제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합니다.”

검은 들녘에서 추수한 북흑조의 맛이 궁금하다면 인사동에 자리 잡은 행복한상(@story_hansang)으로 향하면 된다. ‘진지한밥’을 외치는 이 식당은 원산지와 품종을 꼼꼼하게 비교해가며 먹는 커피, 와인처럼 쌀도 골라가며 먹는 것을 권유한다. 정식을 주문하면 백미와 현미 각각 두 가지 가운데 원하는 쌀을 고를 수 있고 그 가운데 북흑조 현미로 지은 밥을 맛볼 수 있다. 오픈 주방 가까이에 앉으면 지글지글 솥의 꼭지 돌아가는 소리와 온도와 시간을 쌀 종류마다 다르게 조절하는 빨간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토종쌀과 밥 테이스팅 워크숍’이 열린다. 토종쌀이란 신세계에 눈뜨고 싶어서 참가해봤다. 마치 와인 시음회처럼 작은 종지에 담겨 있는 자광도, 흑갱, 대관도, 대궐도, 북흑조를 코로 킁킁거려도 보고 ‘피니시’가 느껴질 때까지 오물오물 씹어보며 맛을 음미했다. 1부터 5까지 적힌 숫자에 향기, 찰기, 식감에 대한 점수를 매겨봤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골라보자면 약밥을 먹는 것처럼 찰기가 강하고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흑갱을 선호도 1순위로 기입했다. 식감은 거칠었지만 꼭 시루떡을 씹을 때처럼 고소한 팥 맛이 나던 자색 쌀, 자광도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 워크숍이 끝나고 나서 나눠준 ‘2017토종벼 품종 하이라이트’ 카탈로그에는 찰벼 23종, 메벼 36종의 히스토리와 특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 ‘짬짜면’ ‘반반무마니’처럼 두 가지 쌀을 한 그릇에서 동시에 즐기는 날도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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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ark Jaeyong
푸드 스타일링 김 보선
어시스턴트 전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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