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는 일하고 싶다

문소리가 영화를 발표했다. 직접 쓰고, 찍고, 출연했다. 그는 소위 ‘알탕’으로 전락한 한국영화계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이렇게 재미있는 한국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정확히는, 자신 있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오랜만이다. 단지 볼거리를 위해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벗기는 한국형 스릴러, 사회적 약자와 여자들을 향해 가학적 농담을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한국형 코미디, 남자들이 바람피우고 여자 꾀고 창녀를 학대하는 한국형 예술영화, 남자들이 민족을 구하는 동안 톱 클래스 여배우들이 ‘불쌍한 누이’ 역으로 재능을 낭비하는 한국형 서사극…. 그게 최근 몇 년간 스크린에서 우리가 본 것들이다. 그리하여 많은 여배우들이 “연기하고 싶지만 출연할 작품이 없다”고 불평할 지경에 이르렀다.

“쟤는 시나리오 쌓아놓고 읽겠지 생각하지만 진짜 작품이 없어요.” 전도연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소리를 들은 게 13년 전이다. 그사이 영화계는 더 나빠졌다. 대기업 중심 투자 환경, 개봉 초기 스크린 독과점으로 흥행 성패를 가르는 와이드 릴리스 시스템은 한국영화계의 다양성을 말살하다시피 했다. 투자자들은 데이터를 원한다. 일부 장르영화와 서사극의 성공은 아류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대자본에 의해 기획된 영화들이 시즌마다 멀티플렉스를 장악하고 억지 천만영화가 되고, 그럼 또 그것을 사례 삼아 엇비슷한 영화들이 기획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설 자리는 드물다. 악순환이다. 소위 ‘남자영화’라 불리는 스릴러와 액션 등 장르물이 대세를 이루는 동안 여자들은 남성 영웅의 조력자 내지 희생자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번 스크린에서 밀려난 여자들에게는 좀처럼 만회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2017년 한국 박스오피스 50위 권 내에 여배우가 크레디트 1순위로 오른 한국영화는 <악녀>(8월 말 기준, 전체 37위, 관객수 120만 명) 한 편뿐이다. 일명 ‘알탕영화(남자만 들끓는 최근 한국영화의 남초 현상을 비하하는 말) 판’의 또 다른 문제는 덜 떨어진 여성관이 아무렇지 않게 답습된다는 것이다. 최근 남자 스타들이 멀티캐스팅된 <브이아이피>는 스너프 필름(폭력, 살인, 강간 등 잔인한 장면을 연출이 아니라 실제로 찍은 불법 영상)에 가까운 여성 학대 신으로 비난을 받았다. 박훈정 감독은 내부 시사에서 여직원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여자에 대해 무지했다고 고백했다.

이 상황에서 여배우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브이아이피> 시사회가 있던 날, 영화계 여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같은 질문이 나왔다. 응당 한국 영화판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온통 남자영화뿐이라 여배우들이 할 일이 없다거나 여성 관객의 참을성이 한계에 이른 것 같다는 얘기, 위험 수위에 다다른 여성 학대 서사와 그것을 가능케 한 영화인들의 저열한 성 관념 및 불균형한 권력 구조, 나아가 여배우 폭행 혐의로 피소된 유명 남성 감독의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 여성 스태프에게 추잡하게 굴기로 유명한 남자 톱스타의 뒷담화까지 오갔다. 그리고 우리는 리즈 위더스푼을 이야기했다. <금발이 너무해>(2001) 이후 오랫동안 배우로 빛을 못 보던 그는 2015년 <와일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가 직접 원작 소설의 판권을 구입해 제작한 작품이다. 같은 부문 경쟁작 <나를 찾아줘>도 그가 제작한 것이었다. 위더스푼은 제작사를 차린 이유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지난해 여배우들의 앙상블이 빛나는 TV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를 제작, 출연해 또 한 번 성공을 거뒀고,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북로그컴퍼니)와 <드라이>(알에이치코리아)를 비롯해 강렬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수집하다시피 사들이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제작사를 차리거나 감독으로 변신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리즈 위더스푼처럼 명확한 방향성과 철학을 가지고 성과를 만들어나가는 이는 드물다. 왜 여자영화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왜 남배우의 커리어 최고점은 50대인데 여배우는 30대 중반이면 꺾이는가? 왜 내로라 하는 여배우들이 시시한 배역 하나를 따기 위해 경쟁해야 하나? 위더스푼의 행보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기된 이 같은 문제의식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날, 시사회가 끝나고 모인 여기자들은 왜 한국에는 리즈 위더스푼이 없는가 자문했다. 한국의 성공한 스타들은 부동산을 사거나 연예기획사를 만들면 만들었지 영화 제작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덕혜옹주>(2016) 제작비 일부를 투자하고 수익 회수에 성공한 손예진의 사례가 전부였다. <여배우는 오늘도>가 공개되기 전 얘기다.

왜 여자영화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왜 남배우의 커리어 최고점은 50대인데 여배우는 30대 중반이면 꺾이는가?

2014년 할리우드는 소니픽쳐스 이메일 해킹 사건으로 진통을 앓았다. <아메리칸 허슬>(2014) 출연진 중 당시 이미 <헝거게임> 시리즈로 막대한 팬덤을 얻은 제니퍼 로렌스가 조연급인 제레미 레너보다 낮은 출연료를 받은 사실이 폭로되면서 여배우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만일 현 상황(남녀 배우의 임금 차별)에 불만이 있다면 그걸 해결할 책임은 (여)배우들에게 있다.” 그게 당시 소니픽쳐스 경영자의 반응이었다. 여러 모로 무책임하지만 자극은 되는 말이다. 업계 전체의 의식과 시스템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계속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여기,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낸 여배우가 있다. 여성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영화에 정당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 ‘감독’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만든 세 개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습작치고는 과분하게도, 무려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에 빛나는 ‘배우’ 문소리가 주연을 맡아 특유의 세련된 연기를 펼친다. 극 중 문소리는 사는 게 고달프다. 만나는 사람마다 ‘여배우, 여배우’ 치켜세우지만 젊고 매력적인 여배우들에게 치여 배역은 없고, 할 일이라고는 특별출연이나 엄마의 임플란트 할인을 위한 치과 방문이 고작이며, 육아와 시어머니 병간호로 정신없고, 재정 상태는 엉망진창인 데다, 무례한 제작자들 비위 맞추느라 진땀을 뺀다. 영화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은 영화라는 점에서 일견 홍상수가 떠오른다. 하지만 감독의 세계관과 젠더 의식은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장면마다 풍자와 아이러니가 넘쳐 흐르는 매우 지적인 코미디다. 상황은 저열하지만 주인공은 세상과 자신을 조소하거나 비관하거나 응석을 부리는 대신 품위를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그 모습이 자주 폭소를 자아낸다. 한국영화가 오래 잊고 지낸 ‘페이소스’라는 단어를 다시 꺼낼 때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말도 마라, 심지어 감동적이다. 영화의 말미, 감독은 이토록 치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 지질한 영화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놀랍도록 우아한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해낸다. 결국 이것은 자신을 끝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영화계를 향한 한 여배우의 뜨거운 사랑 고백이다. 한편, 모처럼 ‘이게 맞나?’ ‘이래도 되나?’라는 회의감 없이 개운하게 웃고 울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성실한 직업인이자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스크린에 더 많은 여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위한 완벽한 근거다. 이 재능 있는 연출자는 여전히 연기가 자신의 1순위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배우, 작가, 감독 문소리가 모두 필요하다. 여자의 얘기를 들려주는 작가와 여배우를 제대로 써먹을 줄 아는 감독, 그리고 그들의 성공 사례가 필요하다. 때문에 만일 여성 관객들에게 올해 단 한 편의 영화를 추천해야 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얘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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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 숙명(칼럼니스트)
사진Feel & P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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