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상을 떠난 사람들

우리의 곁을 떠나갔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갈 사람들이 있다. 2017년을 보내며,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을 적어본다.

김주혁
1972년 10월 3일~2017년 10월 30일

자체적으로 기획한 ‘김주혁의 밤’에, 김주혁이 남긴 영화들을 본다. 가끔 꺼내 보게 되는 옛날 사진 같은 영화 <싱글즈>에서, 김주혁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밥 살 거예요, 말 거예요? 그쪽이 싫으면 내가 사고.” 오랫동안 좋아한 여자의 결혼식장에서 ‘세월이 가면’을 부르던 <광식이 동생 광태>부터 동네의 온갖 일에 참견을 하던 <홍반장>, 술과 실연에 취해 비틀거리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까지. 돌이켜보면 모두 좋았던 기억들뿐이다.

작년 이맘때 <바자>와의 촬영을 앞둔 김주혁은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보내 오며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배우들은 어차피 연기 자체가 ‘척’이다. ‘척’하지 않는 것. ‘나 사진 찍어요’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것. 그냥 무심히 있다가 찍힌 느낌. 기존에 짜여 있는 틀에서 벗어나는 느낌….” 몇 차례 시안을 건넸지만 그는 아무런 과장이나 포장이 없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별다를 것 없는 촬영 현장이 특별해진 것은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의 김주혁’을 담담히 담기로 한 우리는 시안과 컨셉트를 버리고 김주혁의 옷장에서 꺼내 온 옷으로 촬영을 했다. 포즈를 취하는 대신에 촬영장 밖을 서성이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담았다. 친한 사람이 찍어준 것처럼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는 얼굴도 사진에 담겼다. 이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사용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촬영이 끝나고 마주 앉은 자리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 나는 그에게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1박 2일>의 유호진 PD가 ‘주혁이 형’에게 전해달라고 한 질문이었다. 그는 “그런 질문을 왜 해?”라고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답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잘 살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무섭죠. 아무리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조금은 무서울 거예요.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저 사람, 참 삶을 멋있게 살았다’라는 말을 듣고 싶거든. 그런데 지금 내 삶이나 나는 너무 멋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만난 김주혁은 멋있는 사람이었다. 김주혁, 마흔다섯 살, 술보다 옷을 좋아하고,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무심한 말투와 간결한 매너 뒤에 차분한 열정과 다정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사람. 그는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는 남자이자 존중할 수밖에 없는 직업 정신을 가진 배우였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품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멋지게 나이 들어 가는 그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믿을 수 없는 부고 소식을 들은 날부터 지금까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파편적인 생각들이 한 덩어리로 엉켜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살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멋있는 사람’으로 회고하고 있다. 이 말을 들으면 그가 기뻐할까?

에디터/ 김지선


존 버거
1926년 11월 5일~2017년 1월 2일

2017년의 시작에 대해서라면, 나는 <바자>에 존 버거의 장수와 계속될 창작 활동을 응원하는 편지를 쓴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편지를 쓰면서,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존 버거가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한 작가인지 생각했다. 2016년 11월 5일이 존 버거의 아흔 번째 생일이었다. 내가 글을 시작한 것은 그의 아흔 번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내 원고가 실린 <바자>가 세상에 나오고 얼마 되지 않은 2017년 1월 2일 존 버거의 부고가 찾아왔다. 살아 있는 이의 생일을 기념하는 일과 세상을 떠난 이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얼마나 비슷하고도 다른 일인가.

존 버거는 미술평론계의 슈퍼스타였다. 그보다 더 유명한 미술평론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대표작의 제목은 무려 <다른 방식으로 보기>였다. 비단 미술을 전공하는 경우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시선’의 문제를 생각하는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자주 불려 나오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존 버거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소설을 기억한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A가 X에게>라는, 가혹하고 가혹한 만큼 아름다운 연애소설. <제7의 인간>은 존 버거의 삶을 바꾼 책이라고 말해진다. 이주노동자와 소작농의 삶에 대한 그의 숙고를 담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책 한 권 한 권을 호명하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라도. 그는 쓸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썼고, 삶이 글을 배신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언어는 그에게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의 이 문장은, 그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글/ 이다혜(북 칼럼니스트)


마광수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나 빨리 순응해버려 스스로의 본성에 정직하기 위한 투쟁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지. 그때부터 삶은 재미없어지는 건데.” 마광수가 했던 말이다. 그래서일까,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그는 미련스러우리만치 세상과의 불화를 이어갔다.

1989년 ‘성’에 대한 소회를 진솔하게 풀어낸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발표하며, 재직 중이던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수개월간 강좌가 폐지되는 등 교수로서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았지만, 한껏 더 ‘야한 여자’인 <즐거운 사라>를 곧이어 발표했고, 결국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연행되는 와중에도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했다.

법정 공방과 사회적 비난, 그리고 수감 생활. 단지 ‘야한’ 책을 쓴 대가치고는 지나친 처사였고, 질릴 법도 했지만, 당시 쓴 시만 보더라도 그에게 ‘순응’할 의사는 없었던 듯하다. “감옥 속에 앉아 늦가을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 빗소리는 더욱더 섹시하게만 들려 으스스 요염무쌍한 처녀귀신이라도 나타날 듯한 분위긴데 좌우를 둘러봐야 플레이보이 잡지 하나 없고…”

“사라로 인생을 망쳤다”는 하소연 역시 사실상 빈말에 가까웠던 것이, 그는 <발랄한 라라>(2008), <돌아온 사라>(2011), <2013 즐거운 사라>(2013)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점점 더 고립을 자초하는 듯했다. 신경성 위궤양과 우울증이 그를 괴롭혔지만, 주류로 다시금 편입되기 위한 전략은 기어코 세우지 않았다. 소위 명문 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던 그였고, 윤동주를 주요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본인도 촉망받는 엘리트 교수의 대열에 합류했었던 터라,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였다.

말년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혹자는 가슴 아파한다. 하지만 그의 체구는 태생적으로 왜소한 것이었고, 열악한 치아 상태는 젊은 시절 받았던 돌팔이 치과 시술의 후유증이었지, ‘비운의 천재’가 겪어야 했던 ‘비극’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는 기관지염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을 감내해가면서도 담배를 입에서 내려놓지 않은 사람이었고, 식욕을 잃을 정도로 우울하다면서도 산다라박의 사자머리를 보고는 대뜸 ‘그런 개척 정신에 큰 점수’를 주고 싶어 할 만큼 살아 있는 감각의 소유자였다. 화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남루한 적은 없었다. 그는 줄곧 자신감 넘쳤고, 위트 있었으며, 그의 말마따나 ‘야했다’. 그의 ‘야했던’ 삶에 경의를 표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보내고 싶다.

글/ 구회일(프리랜스 에디터)


조지 로메로
1940년 2월 4일~2017년 7월 16일

올해 세상을 뜬 조지 로메로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좀비들은 음습한 부두교의 마법 세계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영혼 없는 하인이었고 삶과 죽음 사이에 갇힌 몽유병자들이었다. 로메로의 좀비에 익숙한 관객들은 1940년대에 자크 투르뇌가 발 루튼 밑에서 만든 아름다운 좀비판 <제인 에어>,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를 보면 당황할 것이다. 좀비라는 이름만 공유할 뿐, 투르뇌의 좀비는 로메로의 좀비와 전혀 다르다. 이전의 좀비물은 초자연적인 마법과 종교적 믿음의 산물이다. 로메로의 좀비는 과학을 적당히 무시한 SF에 속해 있으며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살을 뜯어 먹는 괴물들이다. 로메로의 좀비 3부작에서 좀비라는 단어는 단 한 번 등장하며 그것도 오로지 비유로만 쓰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좀비라고 하면 부두교의 좀비보다는 로메로의 좀비와 종말론적 세계관을 떠올린다. 조지 로메로가 만든 이 시체들의 세계는 창조자의 손을 떠난 지 오래다. 언젠가부터 살아 있는 인간의 뇌에 대한 특별한 기호가 생겨나더니 이제 좀비들은 로메로의 세계에선 상상할 수 없던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로메로는 이런 경향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창조자의 손을 떠나 자생하는 세계야말로 창조자의 가장 큰 성공이 아니겠는가.

글/ 듀나(영화평론가)


피에르 베르제
1930년 11월 14일~2017년 9월 8일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r)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평생 동반자이자 이브 생 로랑 하우스를 일군 기업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피에르 베르제라는 남자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이브 생 로랑이 아니라 바로 메세나여야 한다. 아티스트의 재능을 키우고 상업화시켜 스타로 만드는 그의 천부적인 매니지먼트 능력은 이브 생 로랑뿐 아니라 화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를 구원했다. 베르제의 연인이기도 했던 뷔페는 그 덕택에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등극했다. 소설가 장 지오노(Jean Giono)의 측근으로 장 지오노 문학상을 비롯해 12월 문학상, 마르그리트 뒤라스 문학상, 피에르 마코를랑(Pierre Mac Orlan) 문학상 등 4개의 주요 문학상을 조직하고 후원했다. 장 콕토가 살던 집을 사들여 수리하고 복원해 일반에 공개했으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박해 받던 모로코 출신 작가 압델라 타이아(Abdellah Taïa)의 저서를 5만 권이나 사전 구매함으로써 출간을 도왔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 국립 오페라단의 단장으로 바스티유 오페라좌의 개관을 성공시켰고 소외 계층의 아이들을 오페라에 초대하는 시스템을 창안했다. 프랑스의 가장 대중적인 동성애 잡지 <테튀(Tétu)>의 주인이자 프랑스 내 가장 큰 에이즈 치료 후원 재단의 소유자였다. 2009년, 일명 세기의 경매로 알려진 이브 생 로랑과 그의 이름을 건 미술 컬렉션 경매에서 얻은 3백70억 유로라는 천문학적인 수입 대부분을 동성 결혼 합법화를 위한 정치 운동과 에이즈 등을 비롯한 질병 연구에 투자했다. 전무후무한 고서적·미술 컬렉터였던 그는 퐁피두 센터,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레노베이션을 후원했으며 퐁피두 박물관에는 키리코의 작품을, 오르세 박물관에는 번 존스의 태피스트리를 기부했다. 2015년 총 판매가만 11억 유로에 달했던 자신의 고서적 경매를 진행하면서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Nadja)> 원고를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글로브> 매거진과 <르몽드>의 대주주로 열렬한 사회당원이었던 그는 미테랑 대통령을 비롯해 동성애자로서 파리 시장을 역임한 베르트랑 들라노에, 현 프랑스 대통령인 엠마누엘 마크롱의 정치 활동을 도왔다. 그는 진정 위대한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사회적인 차별을 철폐하는 데 헌신했다.

글/ 이지은(오브제 경매사)


정재원
1917년 1월 4일~2017년 10월 9일

학창 시절 나는 줄곧 (반강제적으로 신청한) 우유를 화장실에 따라 버리곤 했다. 코를 막고 먹어야 했던, 마시면 배가 부글부글했던 흰 음료. 어른이 된 후 스스로 발견한 취향은 단연 두유라는 신세계였다. 달큰한 첫맛, 고소한 뒷맛, 신뢰감 가는 두둑한 단백질 함유량까지. 눈도 잘 떠지지 않는 아침 출근길과 어깨가 축 늘어진 퇴근길에 마신 두유 총량은 한강은 아니라도 그 옆 수영장 정도는 자작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음료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안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출근길 심드렁하게 넘기던 트위터 피드에서, 정식품 정재원 명예회장의 부고 기사를 접하고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헌책방, 먼지 뽀얗게 쌓여 있을 법한 위인전 같은 그의 삶은 ‘신화’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향년 100세. 정재원 회장은 황해도 은율 산골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궂은 일을 전전했다. 15살 때 의학강습소 심부름꾼으로 들어가서 수천 장의 종이를 복사하다 배움의 갈망을 느끼고 독학으로 19세에 의사 검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후 백일도 안 된 갓난아이가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왔고 아기를 살려내지 못한 일을 괴로워하며 43세의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다. 영어도 서툰 만학도는 런던과 미국에서 약 4년의 시간을 보내며 소아 알레르기 질환을 밝혀내는 연구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는 유당불내증이란 병명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콩국에서 힌트를 얻었다. 오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서울 회현동 자신의 소아과 병원 지하실에 맷돌과 가마솥을 들여놓고 두유 연구를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외국물’ 먹은 의사 선생이 느닷없이 콩 때문에 실험실까지 차린 행보에 수군거렸고 유일하게 그와 뜻을 함께한 아내만이 콩을 갈고, 쥐어짜주고, 손이 부르터서 피가 나도록 도와주었다고 정 회장은 훗날 회상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두유 ‘베지밀’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한동안 손바닥만 한 빈 두유 갑을 마주할 때마다 어느 의사의 헌신적인 삶을 떠올릴 것 같다.

에디터/ 김아름


김영애
1951년 4월 21일~2017년 4월 9일

김영애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잦은 병환, 스캔들, 사업의 부침, 법정 투쟁으로 거듭 고꾸라졌다. 그때마다 김영애는 연기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물기 어린 목소리, 서늘한 눈빛, 세련된 이목구비였다.

스무 살 때인 1970년 MBC 공채로 데뷔한 그는 1973년 단막극 <민비>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 김자옥, 한혜숙 등과 더불어 ‘70년대 안방극장 트로이카’로 불렸다. 일찌감치 ‘연기파 배우’라는 명성을 얻은 그는 1980~90년대까지도 숱한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거머쥐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생활은 건강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가정불화로 고통받았다. “늘 병원에 실려 다니고 술에 찌든 생활을 하던” 그는 2000년에 첫 이혼을 했다. 그 무렵 건강 회복차 황토를 사용한 게 사업으로 발전했다. ‘김영애 황토팩’은 대성공을 거뒀다. 연 매출이 6백억원에 달했다. 그는 여성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기업가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동업자이자 두 번째 남편은 그의 연기 활동을 반대했다. 그로 인해 2004년부터 2년 반 동안 연기 활동을 중단했지만 운명처럼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갱년기)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남편이 오죽하면 같이 죽자고 했다.” 급기야 남편이 대본을 구해왔다. 드라마 <황진이>(2006)였다. 혹독한 스승 ‘백무’는 젊은 시청자들까지 사로잡았다. 김영애는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깊은 바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7년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에 황토팩이 나왔다. 환불 요청이 빗발쳤다. 식약청은 제품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법원은 제작진에 정정 및 반론 보도를 명령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방송국 앞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자살을 할까”도 생각했다. 설상가상 2008년에는 어머니를 잃었고, 두 번째 이혼을 했다.

이번에도 그를 살린 건 연기였다. 영화 <애자>(2009)로 컴백한 그는 “카메라 앞에 선 첫날 너무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연기에 전념했다. 끝까지 그러려 했다. 하지만 불행은 또 다시 그를 덮쳤다. 췌장암이었다. 병원을 오가며 <해를 품은 달>(2012)을 찍었다.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연기자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병을 이겨낸 것 같았다. 2014년에는 영화 <변호인>으로 부일영화상, 대종상, 청룡영화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잠잠하던 병마는 2017년 재발했다. 4월 9일,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67세였다. 불굴의 예인은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글/ 이숙명(칼럼니스트)


조동진
1947년 9월 3일~2017년 8월 28일

“내가 후배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마린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에요. 스타크래프트의 마린 말이에요.” 조동진의 드문 인터뷰에서 그는 하나음악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2003년 음악평론가 신현준과 가진 인터뷰였다. 유난히 이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의외성 때문이었다. ‘마린이라니, 스타크래프트라니….’ 늘 세상과 한 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조동진의 입에서 스타크래프트 용어를 듣는 건 생경한 일이었다. 조동진을 수식하는 말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아마도 ‘포크계의 대부’란 수식어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고, 속세와 떨어져 사는 듯한 은둔자 같은 표현은 그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과 동떨어진 적이 없다. ‘최신’이나 ‘첨단’과도 멀어진 적이 없다.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각종 게임을 누구보다 빨리 접하고 몰두했다. 음악이나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기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음악 안에서 최신 음악을 듣고 이를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아날로그’란 말이 괜스레 그럴싸하게 들리는 지금 시대에도 그는 ‘디지털’을 찬양했다. 그는 디지털의 힘을 빌려 음악을 만들 때 처음 구상했던 사운드를 담은 박스 세트를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14년 만에 신현준은 조동진과 다시 인터뷰를 가졌다. 운 좋게 그 자리에 나도 함께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과거의 이야기부터 새로운 리마스터링에 관한 이야기, 또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 한 일간지에 실었다. 그가 얼마나 세간의 인식과 다른 ‘젊은’ 아티스트였는지, 그의 세계가 얼마나 넓었는지를 알리는 데 집중했다. 갑작스레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우리는 황망해했다. 황망함 속에는 짙은 아쉬움도 있었다. 그저 그의 유언과도 같은 박스 세트를 들으며 헛헛함을 달랠 뿐이다.

글/ 김학선(음악평론가)


다니구치 지로
1947년 8월 14일~2017년 2월 11일

끝나지 않을 줄 알았다. 계속될 것 같았다. 도쿄의 구루메 거리를 지나 동네 골목, 그리고 에도의 곳곳을 누비던 그 길에 끝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길 바랐다. 다니구치 지로의 부고는 너무나 돌연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최근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는 생활이란 건 흘러오는 얘기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신작을 위해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를 한 달간 빌린 사람이다. 그리고 그걸 <천년의 날개, 백년의 꿈>이란 이름의 만화로 펴냈었다. 심지어 201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문화훈장 슈바리를 받으면서는 “에도(작품 <에도 산책>)를 지나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까지는 해보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런 그가, 영영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 마치 <개를 기르다>의 탐이 그렇듯 안타깝게, 애절하게.

다니구치 지로는 다르다. 여느 일본 만화와 달리, 소위 아니메들과 달리 느린 시간을 산다. 유럽의 만화 밴드 데시네(Bande Dessinée)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가 말하는 그의 만화는 컷과 컷 사이에 생략이 없고 배경 하나하나에 삶이 있다. 그의 만화는 천천히 보아야 하는 만화다. 천천히, 공을 들여 바라보아야 풍경이 제대로 보이고, 인물의 감정이 그려지며, 이야기의 결이 살아난다. 그래서 다니구치는 일본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 실제로 그의 작품 <에도 산책>이 만화 주간지 <모닝>에 연재됐을 때, 다니구치는 ‘이건 안 되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자신의 만화가 다른 만화들의 스피드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그의 만화는 소중하다. 그는 천천히 봐야만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삶의 정수를 길어낸다. 유럽에서 그의 작품이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쿠스미 마사유키는 다니구치 지로와 모두 두 번을 함께했다. <고독한 미식가>와 <우연한 산보>. 쿠스미는 다니구치를 ‘조용함을 품은 도전자’라 표현한다. 도전자, 둘은 새로웠다. 1990년대 당시 요리비평가인 야마모토 마스히로나 미슐랭 붐이 불고 있던 한가운데서 둘은 ‘안티 구루메’를 외쳤다.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먹는지, 그러니까 주인공 이노카시라 고로가 어떻게 공복을 채워나가는지가 중요한 만화를 만든 것이다. <고독한 미식가>의 탄생이다. 이는 다니구치 지로를 이야기하면서 간과되는 부분이다. 그의 느긋한, 기분이 편한 화풍에 가려져 그의 차이, 새로움은 자주 거론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니메 왕국에서 유독, 거의 독보적으로 홀로 느긋한 만화를 만들고 있는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새로움이다. 심지어 <에도 산책>은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이 새의 시점이 됐다, 고양이의 시점이 됐다 하면서 에도를 바라보는 것, 그것만을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그립다. 그의 산책이 자꾸 생각난다. 오늘은 우연한 산보를 해야 할 것 같다.

글/ 정재혁(칼럼니스트)


카를라 펜디
1937년 7월 12일~2017년 6월 19일

“우리는 사랑하는 카를라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녀의 사망 소식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헌신의 본보기였으며, 일과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6월 19일 펜디의 창립자인 아델과 에두아르도 펜디 커플의 다섯 딸 중 한 명인 카를라 펜디가 79세의 나이로 우리의 곁을 떠난 바로 다음 날 펜디의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이런 글이 포스팅되었다. 당시 나는 펜디 코리아에서 잠시 홍보·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요즘 추세가 그러하듯 그녀의 사망 소식은 펜디 로마 본사의 공식 발표를 메일로 접하기도 전에 이미 SNS를 통해 알려지고 있었다. 펜디는 조촐한 공식 발표 이외에 특별히 그녀의 사망 소식을 부각시키지 않았다. 펜디 가문의 다섯 자매는 자신들을 드러내기보다는 언제나 칼 라거펠트라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뒤에 서서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를 이끌어왔다.

1925년 로마에서 모피 가죽 숍으로 시작한 펜디 가문은 1946년 파올라, 프랑카, 칼라, 알다, 안나 펜디가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부르주아를 위한 보편적인 모피가 아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패션 하우스로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카를라 펜디가 있었다. 1965년 당시 30대의 젊은 칼 라거펠트를 디자이너로 영입,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행보를 택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 업계에서 이 같은 조합은 없었어요. 카를라의 아이디어였죠! 그녀는 천재였어요.” 작년 <바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칼 라거펠트는 펜디에서의 지난 52년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로 인해 칼 라거펠트는 지금의 펜디를 상징하는 더블 ‘F’ 로고를 탄생시켰고 이 로고에 담긴 의미인 ‘Fun Fur’는 펜디의 차별화된 DNA로 자리매김하여 퍼로 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창작의 나래를 무한대로 펼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본 전 <보그> 이탈리아의 편집장인 프랑카 소차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혁신의 데스크 소차니>에서 그녀는 “이탤리언이라는 게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활기차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인 관점과 유머 감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세상 일을 항상 뒤돌아보거나 심각하게만 보지 않는 가벼움. 인생엔 그게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카를라 펜디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을 거라 생각한다. 앞서 소차니가 말했던 ‘이탤리언의 유머 감각과 가벼움’으로 펜디 자매들은 가업을 물려받았을 당시 럭셔리한 밍크 코트로만 알려져 있던 퍼에 ‘재미’라는 요소를 더했고 ‘즐거움’과 ‘유머’라는 코드는 펜디 제품의 밑거름이 되었다. 스트랩 대란을 불러온 스트랩 유, 백 버그라 불리던 펜디 몬스터 참, 최근 멘즈 컬렉션에서 선보인 팝적인 보캐뷸러리까지 펜디는 입고 드는 재미를 매 시즌 강조하고 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역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웃어 넘길 수 있는 유머 감각이 아닐까 싶다.

글/ 하주희(<인디비주얼>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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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Getty Images, Jang Dukhwa(김주혁), 푸른곰팡이(조동진), 정식품(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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