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산다는 것

현재 20~30대 한국인들의 꿈 중 하나가 이민이다. TV에서는 ‘OO에서 한 달 살기’를 아이템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주위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입버릇처럼 외국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로망이 아닌 현실은 어떨까? 지금 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 사람이 외국 생활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너머로 샤드(Shard)가 눈에 들어온다.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런던의 랜드마크 말이다. 토요일 밤인 데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태원에 가까운 쇼디치에 살고 있는 덕에 온 동네가 취객의 주사와 사이렌 소리로 난리다. 렌초 피아노와 쇼디치, 이렇게 쓰고 보니 그럴싸해 보인다. 남편의 유학으로 런던으로의 이사가 결정됐을 때,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매달 마감과 카드 값에 허덕이는 지난한 삶에서 탈출할 수 있다니, 이보다 달콤할 순 없었다. 게다가 런던에서 1년간은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를 배울 계획이었다. 즉, 일할 필요도 없고 점수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다들 부러워했다. 언제든지 테이트 모던과 사치 갤러리에 갈 수 있겠다고, 이제 영어를 잘하겠다며, 어찌 됐든 외국에서 살아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모두의 아낌없는 축복을 받으며 나는 런던으로 떠났다.

그렇게 런던에 온 지 10개월째. 솔직히 말하면 그 ‘좋은 경험’의 실체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게 ‘고생’의 다른 표현이라는 내 짐작이 맞다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한 구절로 풀어 설명할 수 있을 듯싶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상상 이상으로 런던에서의 삶은 지나치게 새로웠다. 예측과 대처가 불가능한 일의 연속. 지하에서는 물론 맥도날드 구석 자리에 앉으면 휴대폰 인터넷은 고사하고 문자조차 되지 않았고(런더너들이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제는 도로 공사로 인해 갑작스럽게 집 앞 버스정류장이 사라졌으며(빈번한 일인지 나만 당황했다. 하긴, 이런 종류의 일에 당황하는 사람은 늘 나뿐이다) 내 입맛에 맞는 과자 하나를 찾기 위해서 열 봉지 이상의 실패를 맛봐야 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영어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일취월장한 건 리액션뿐. “이제 영어 좀 잘하겠네.”라는 말을 들으면 난 그냥 농담인 척 이렇게 진실을 말해준다. “우린 늦었어. 영어는 어릴 때 배워야 돼.” 어학원은 2개월 후면 끝나는데, 나는 아직도 외국인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파파고’의 힘을 빌리곤 한다.

내게 어학원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에 가깝다. 영어는 덤이다. 어학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런던의 가장 큰 미덕을 꼽으라면 다양성이다. 이민자가 많은 덕에 여러 문화와 인종에 개방적이고 소수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위협받을 확률이 ‘비교적’ 적다. 그만큼 삶의 형태도 가지각색이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경유지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얼마 전 페루로 떠난 친구 조니의 말에 따르면 런던에 사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런던이 목적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정말이지, 내가 만난 런던 친구들은 한남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하듯 가볍게 대륙을 오간다. 런던에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자 <바자>의 필자이기도 한 시인 데이비드 역시 아르헨티나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유는 단순하게도, 런던이 지루해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곧 중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또 다른 친구 매튜는 약간 회의적인 말을 남겼다. “누구나 자기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다른 곳으로 가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어. 일단 사람은 그대로잖아. 환경엔 적응하기 마련이고.” (런던이나 서울이나 긍정적인 사람들은 다 멸종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처럼 나는 런던에 서서히 익숙해졌고 여기서도 여전히 매달 마감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막연한 탈출이 아니라 살고 싶은 도시를 선택한다는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 1년 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하면서. 글/ 권민지(프리랜스 에디터)

외국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

현재 내 나이는 한국 나이로 47세. 20년간 ‘빡세게’ 즐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2년 전 남편과 함께 베를린에 첫발을 디뎠다. 독어는 완전히 젬병이었고, 더군다나 베를린은 여행으로도 와보지 않았던 도시였다. 2년짜리 어학 준비 비자를 명목상 받아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다 결국 우리는 베를린을 선택했다. 서울을 떠나 베를린에 오게 된 이유는, 오랜 직장생활에 길들여진 나 자신을 바꾸고 타인의 시선의 무게에서 도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전부였던 직장을 그만두니 모든 생활이 무료해졌고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다. 오랜 직장생활 끝에 얻은 임원 직함은 직장을 그만둔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내 의지로 그만둔 직장임에도 막상 그만두고 나니 잘나갔던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미지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남 신경 쓰지 않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베를린에서의 길고 긴 겨울을 보내며,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한 끝에 그건 결국 요식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장 조사를 시작했다. 아직 베를린은 런던이나 뉴욕처럼 한국 레스토랑이 많지 않았고, 시도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이 많은 기회를 잡지 않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치맥’이었다. 치킨 마니아로서 한국에서는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즐겼던 치맥 문화가 베를린에는 없었다. 이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거주지 등록부터 시작한다. 은행 계좌를 오픈하려 해도, 비자를 받으려 해도, 휴대폰 데이터를 신청하려 해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서류가 거주지등록증이다. 그런데 베를린은 요즘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5년 전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값이 올라서 이제는 괜찮은 지역에 20평 정도의 깔끔한 집을 얻으려면 월 120만원은 내야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집을 내 이름으로 계약하려면 안정적인 월급 3개월 증명서(월세의 최소 3배 월급)와 자기소개서, 합법적 비자가 있어야 한다. 나 또한 집을 얻기 위해서 100통 이상의 이메일을 보냈으나 번번히 낙방하다가 간신히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사업 비자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가장 먼저 풀어야 하는 게 비자 문제다. 사업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그 나라의 합법적인 허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 이 사업 비자를 준비하고 받기까지 약 8개월이 걸렸다. 거주지등록증은 물론 사업에 필요한 본인의 자금력과 이력서, 강점을 증명해야 하고, 사업 재무표와 함께 이 사업이 베를린에 어떤 도움이 될지 어필해야 한다. 외국인이 요식업을 목표로 한다면 법인을 세워야 사업 비자가 잘 나오는데, 법인 등록에 필요한 최소 자금은 2만5천 유로(약 3천200만원)다. 이 외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까지 합친다면 대략 10만 유로(약 1억 3천만원)가 들어간다. 사업 비자를 받은 후에는 가게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에 돈을 가져다주면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면 수많은 상점들이 나와 있지만 연락을 해도 답변을 주지 않는 곳이 무수했고, 외국인이다 보니 건물주에게 안정감을 주기 쉽지 않았다. 건물주에게도 가게 콘셉트에 대한 제안서와 나의 신분에 대한 이력 및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관건은 계약이 완료된 후부터다. 비자를 받고 가게를 얻은 후에는 한숨 돌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가장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의 경우 가게를 얻고 나면 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장애인 출입구 및 남녀 화장실, 직원용 화장실과 룸, 주방의 환기 시설 등 음식점으로서 갖춰야 할 시설의 기준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많은 음식점들이 이 허가를 받다가 문을 닫기도 하고, 오픈 후 점검에 걸려서 문을 닫기도 한다. 고로 요식업을 하기 가장 힘든 도시가 베를린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 허가를 받기까지 여러 차례의 삽질을 했고, 상상도 못한 시간과 돈의 출혈이 있었다. 결국 6개월에 걸쳐 허가를 받았고, 지난 11월 치맥집 ‘꼬끼오’를 오픈하게 됐다. 가게를 오픈하고 놀라웠던 건 베를린에 이렇게나 한국 사람들이 많았나, 였다. 체감상으로는 이태원에 치맥집을 연 듯한 느낌이랄까? 돼지고기를 주로 먹는 독일인에게는 아직 치킨이라는 음식이 가깝지 않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나라의 치맥 문화를 이야기해주면 호기심을 보인다. 벌써 단골 고객도 생기고,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감사할 뿐이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한국의 기업 문화가 싫었고, 정치인들은 개떡 같고, 한국 남자들은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왔다. 타지에서의 삶은 조금 다를 거 같아서. 결과는? 다르다.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얻는 것이 있는 한편 잃는 것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내 자신을 스스로를 바꿀 수 없다면 환경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는 후회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글/ 안정아(베를린 치맥집 ‘꼬끼오’ 운영자)

한국을 떠나는 게 무슨 대단한 결심이고 삶의 변화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여기 온 건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님 말고’라고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국에 정착을 한다는 것

내가 사는 누사페니다는 발리에서 배로 30~40분 거리다. 스쿠버다이빙 명소다. 2~3년 전만 해도 이방인이 드물었는데 최근 급속히 유입되고 있다. 잠재력 있는 개척지를 찾는 다이버들과 소규모 투자자들, 발리라는 도시의 편의를 가까이서 누리되 조용히 살고 싶은 은퇴 이민자 등이다. 아직 눌러사는 한국인은 나뿐이지만 외롭진 않다.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만큼 외국인에게 오픈마인드인 곳이 드물다. 한국 드라마, 케이팝 덕도 본다. 부르주아지도 아니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외국어도 잘 못하는데 한국을 떠나 살고 싶다고? “오세요, 인도네시아.”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 오기 전 발리의 우붓에서 6개월 동안 지냈다. 확실히 발리는 장기여행에 적합한 곳이었다. 작가, 영상 편집자, 그래픽 디자이너 등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가 몰려든다. 케이팝 후광을 입은 한국인은 사진, 헤어, 메이크업, 웨딩 쪽으로도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발리가 더 이상 저렴한 동남아 시골 섬이 아니라는 거다. 장기임대 주택의 경우 마치 제주도 농가주택 가격 오를 때처럼 자고 나면 호가가 뛴다. 당신이 뉴욕, 런던 같은 초거대 도시도 아니고 베를린, 포틀랜드 같은 힙스터 도시도 아닌 동남아를 왔을 땐 이유가 있을 텐데, 여기서도 숫자를 고민하며 살아야 하나? 일 년 내내 따뜻한 날씨, 낮은 물가, 예전 발리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누리며 소박하고 안정되게 살고 싶은 내겐 누사페니다가 좋은 대안이었다.

누사페니다는 아직 발리처럼 입맛대로 집을 고를 상황이 아니다. 알음알음 현지인의 집에 방을 얻어 시작하지만 시설이 열악하다. 나는 다행히 서양인이 지은 깔끔한 신축 스튜디오를 구했다. 공과금 포함 한 달 32만 원 정도 든다. 이따금 발리에 오가고 외식하는 거, 비자 연장 비용 다 포함해 월 100만 원 정도 쓰는 것 같다. 비자 문제가 꽤 까다롭고 비싸다. 나는 한국에서도 수익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만 아닌 경우 어떻게 하느냐, 그건 또 아주 긴 스토리인데, 지면 관계상 두 가지 간단한 방법만 소개하겠다.

첫째, 다이빙 강사나 요가 강사, 요리사 등은 프리랜서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 자격증 취득 비용은 비싸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다. 회사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혼자 와서 다이빙 강사 하는 한국 여성들이 인근 섬에도 몇 명 있다. 하지만 인건비가 싼 곳이라 그걸로 돈을 모으긴 힘들다. 동남아에서 ‘욜로’ 하다가 ‘골로’ 간 사람 많이 봤다. 둘째, 땅이나 건물 빌려서 사업하기. 월세로 집을 구해 에어비엔비, 게스트하우스 하며 사는 사람 많다. 내가 알아본 바론 누사페니다 번화가의 12제곱미터짜리 상점 연세가 400만원 정도였고, 아직 카페, 식당이 태부족이니 재주만 있으면 굶어 죽지 않을 게다. 혹시 목돈이 좀 있나? 프랑스인 다섯 명이 6천만원씩 갹출해서 호텔을 짓기도 하더라. 참고로, 인도네시아는 기본적으로 외국인이 부동산을 살 수 없다. 20~30년 단위 장기 리스다. 레스토랑, 카페, 3성급 이상 호텔 등 외국인이 100프로 소유할 수 있는 종목으로 사업자를 낸 뒤 부동산을 구매하는 방법이 있지만 행정 절차가 복잡하며 에이전트 비용도 만만치 않으니까 확신이 섰을 때 도전하는 게 좋다.

내 경우는 살아보니 괜찮아서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땅 찾는 데만 반 년 넘게 걸리는 중이다. 기껏 괜찮은 걸 찾으면 서류가 미비하거나 도로, 수도, 전기가 멀다. 여러 조건이 맞는 건 사이즈가 너무 크다. 그러다 보니 예산이 무럭무럭 커져서 현재는 전망 좋은 곳에 집 짓고 남은 땅에 임대용 방갈로 두어 개 짓는 것까지 초기비용을 1억원 정도로 잡고 있다. 그나마 나는 한국에서 지방 부동산 관련 간접 경험이 많아서 뭘 체크해야 하는지 알고, 여기서 사업하는 친구들도 있어 엄두를 내는데, 무턱대고 도전하면 사기 맞기 십상이다. 동남아뿐 아니라 한국 시골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서울을 떠나 어딘가에 집 짓고 살고 싶으면 꼭 현지에 몇 달 살면서 친구도 사귀고, 지방 유지들과 친분도 쌓고 시작해라. 막걸릿집 떠벌이들 말고 신원 확실한 지역 토호나 사업가들 말이다.

자, 그리하여 집을 갖고 정착을 한다 치자. 어떤 삶이 펼쳐질까? <윤식당>?
<효리네 민박>? 상상에 맡기겠다. 한국 떠나는 게 무슨 대단한 결심이고 삶의 변화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여기 온 건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님 말고’라고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망하거나 싫증나면 ‘아님 말고’ 하면서 다시 서울로 갈 수도 있겠지. 일단 지금은 서울보다 돈, 시간, 관계 스트레스가 덜하고 날씨도 좋은 이곳에서 게으르게 사는 게 체질에 맞다. 혹한과 미세먼지가 겹친 날 전철 타고 출근하는 건 이젠 상상도 하기 싫다.
글/ 이숙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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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일러스트 Snow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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