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마시는 시간

패션 매거진에서 옷으로 절기를 나누듯이, 나는 술로 절기를 나눈다. S/S 시즌에는 맥주를 마시고, F/W 시즌에는 위스키를 마신다.

처음부터 위스키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나는 사시사철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위스키는 코를 찌르는 향이 버거웠고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싫었다. 최초로 위스키를 마시고 ‘음? 이거 괜찮은데?’라고 느낀 순간이 기억난다. 십 수 년 전 광고회사를 다니던 시절 회식 자리에서였다. 당시 나의 팀장은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는데, 그분은 회식 중에 팀원들에게 술을 강권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회식 장소는 횟집이었고 좋은 회를 안주로 발렌타인17을 곁들였다. 나는 언제나 맥주를 고집했으니 그때도 맥주잔을 앞에 놓고 있었다. 박웅현 팀장님이 샷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라주며 말했다. “하나야, 이건 우리끼리만 마시기엔 너무 아까운 술인데.” 술을 강요하지 않는 분이 그렇게 말하니 궁금했다. 코로 숨을 멈춘 채 입을 조금 축여보니 의외로 첫맛이 달았다. 입안으로 들어온 몇 방울의 위스키가 내 입속을 휘감더니 세밀하게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 맛이 사라지고 나니 코로 숨을 내뱉는데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의외로 꽤 즐거웠다. 회와도 잘 어울렸다. 그날 스스로 몇 잔을 마신 것 같다.

인상적인 기억이었지만 그 뒤로도 위스키를 썩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다 내게 위스키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2012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몇 달 동안 첫 책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의 원고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머릿속에서 굴리던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커져버려서 머리 밖으로 꺼내놓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이었다. 몇 달 동안 계속 골몰해 있자니 효율도 떨어지고 점점 더 머릿속이 엉켜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위스키였다. 넓은 유리잔 바닥에 어느 정도 깔리게끔 따라 한 잔씩 마시고 잤다. 그러면 어깨의 긴장이 나른하게 풀어지고 과부하되었던 머리도 조금 식었다. 그런데 자주 위스키를 마시고 향이 감도는 가운데 잠들다 보니 이게 점점 좋아지는 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젠가부터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나서 위스키를 마실 생각에 흐뭇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뭐, 그렇게 된 거다. 오늘날의 나는 블렌디드 위스키 여러 종과 다수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집에 쟁여놓고 돌아가며 마시게 됐다. 물론 바를 돌아다니며 맛본 위스키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 조그만 바에서 일본 위스키 야마자키를 처음으로 마시던 순간이 기억난다. 재스민차를 머금은 것처럼 향긋한 첫맛에 이어 꽃과 과일 향이 달콤하고 부드럽게 퍼지며 입안을 코팅했다. 숨을 쉴 때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났다. 나의 날숨이 고급스러운 향수로 변한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는 게 이렇게까지 즐거워질 수 있다니! 놀라운 기억이었는데, 좀 지나자 안타깝게도 야마자키는 무슨 위스키 상을 수상했다더니 전 세계적인 품귀 현상을 빚게 되었다.

장담하건대 여성이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맨스플레인이 날아든다. 바 옆 자리에 앉은 중년의 신사부터 구석에서 잔을 닦던 바텐더까지 당신에게 위스키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 가르쳐주지 못해 안달이다. 피트향이 어떻고, 하이랜드가 어떻고, 캐스크 스트렝스가 어떻고, 온더록의 얼음은 어떠해야 하고, 이것보단 저게 고급이고, 이렇게 마시는 게 최고고, 저렇게 마시는 건 아니고…. 하지만 이런 얘기는 위스키의 맛을 떨어뜨린다.(그리고 이들이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위스키는 남성의 것이 아니다!) 그냥 자유롭게 마시면 된다. 스트레이트가 독하면 물을 부어 마시고 그게 밍밍하면 진저에일이나 클럽소다를 섞어도 맛있다. 쓰면 설탕을 치고, 신맛이 필요하면 레몬을 넣고, 얼음을 곁들여도 좋고, 몸이 으슬으슬하면 따끈하게 데워서 마셔도 좋다. 다른 술이나 주스와 섞어 마셔도 좋다. 이런저런 위스키를 마셔보고 자기가 선호하는 맛을 알아가는 것도 큰 재미다. 어느 분야든 ‘그레이드’의 세계가 아닌 ‘스펙트럼’의 세계로 접근했을 때 훨씬 행복해지기 쉬우니까. 물론 위스키에 대해 조금 더 잘 즐기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만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해야만 음악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맥주가 ‘친구들의 술’이라면 위스키는 ‘어른들의 술’로 여겨진다. 흥겹게 잔을 부딪쳐가며 마시는 맥주와 달리 위스키는 조용하고 고독하게 마시는 게 어울릴 것만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음악 페스티벌에 갈 때면 나와 내 친구들은 튼튼하고 큼직한 스탠리 플라스크에 위스키를 가득 채운다. 쾅쾅 울리는 음악 속에서 머리 위 밤하늘에 별이 가득할 때 서로 플라스크를 주고받으며 입안으로 흘려 넣는 이 액채는 인생과 우정의 연료가 된다.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특히 맨스플레이너들에게 질린 여성들은) 곧잘 손사래를 치며 “위스키는 잘 몰라요.”라고 말한다. 모르면 어떤가? 인생의 어느 순간 위스키 향이 나를 부르기 시작하면 때가 온 것이다. 농익고, 단단하고, 부드럽고, 매콤하며, 뜨겁고, 달디단 액체와 우정을 쌓아갈 시기가. 여성들이 위스키를 즐기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맨스플레이너를 무시할 것, 그리고 알코올 도수가 보통 40도가 넘는 만만찮은 술이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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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김 하나(카피라이터, <힘 빼기의 기술> 저자)
사진Park Jaeyong
푸드 스타일링Kim B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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