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디즘의 불편한 진실

먹는 일 혹은 먹는 장면을 보는 일이 때때로 피로하다고 느낀 건 당신뿐만이 아니다. 미식가부터 셰프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불편한 푸디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보내왔다.

간 보기와 나눠 먹기 집착

어릴 적 당시 대학생이던 친척은 “커피를 간 보는 사람이 싫다”고 했다. 커피가 나오면 테이블에 있는 설탕과 크림을 넣고 티스푼으로 커피를 ‘쪽!’ 하고 맛보는 그 행위 말이다. 그런 사람은 설탕, 크림이 부족하면 십중팔구 그 티스푼을 공용 통에 다시 넣는다면서. 올림픽과 월드컵이 열리고 강산이 여러 번 변했지만 간 보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건재했다. 다 같이 먹는 탕이 끓기도 전에 이들은 개인 숟가락으로 국물을 간 본다. ‘이후에는 설마 국자로 덜어 맛보겠지’ 믿어봐도 간 보는 사람과 계속 냄비에서 직접 떠 먹는 사람은 대개 일치한다. 수많은 연예인이 리얼리티 쇼에서 요리를 하지만 간 보는 그릇을 따로 쓰거나 숟가락을 한 번만 쓰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간 보는 수저로 여러 명에게 먹여줄수록 배려 넘치는 캐릭터가 생기기도 한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아마도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유용했을) 고유의 미덕을 오해한 건지 나눠 먹기 강박도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분명 개인별로 주문한 코스 요리인데 가운데에 놔달라거나(또는 서버가 알아서 가운데에 놓거나), 예고도 없이 자기 포크, 나이프를 남의 접시에 내미는 경우, 반대로 싫다는데 자기 걸 맛보라고 강요하는 경우, 아니, 처음부터 개인별로 주문을 못하게 진두지휘하는 경우…. 내 요리를 청결하게, 오롯이 즐길 자유가 요원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원래 우리 전통은 좋은 자리일수록 독상이었다. 잔칫집에서도 양반부터 상민까지,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독상을 받았다. 아이는 몸집에 비례한 식기 세트와 상이 따로 있었다. 여러 상을 나란히 하고 모두가 자기 몫을 온전히 즐기는 게 진정한 나눔이었던 것이다. 글/ 이선배(<멋진 사람들의 물건> 저자)

#페이크_푸디

먹는 것에 진지한 사람들이 좋다. 음식을 앞에 두고 인상을 쓰며 포크를 튕기며 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메뉴에 따라 음식에 얽힌 이야기나 이 집의 음식이 유달리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를 타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요즘은 ‘먹는 것에 진지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틀었다 하면 나오는 먹방과 인스타그램이 나의 동지들을 죽이고 있다. ‘좋아요’를 먹고 자란 맛집과 ‘좋아요’를 받기 위해 해시태그로 몸부림치는 음식점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의 먹방을 중독된 양 본 적 있고, 수많은 음식의 영정 사진을 즐겨 찍어왔다. 이제 음식이 나오면 젓가락 대신 휴대폰을 드는 것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감흥이 없는 음식을 맛있는 음식 사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앱으로 보정되어 피드로 흘러들어온 사진, 여기에 속아 주문한 음식은 입속으로 들어가 실망으로 변한다. 완벽해 보였던 음식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고, 화려한 색감으로 치장한 음식은 간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쯤 되면 나는 내 미각을 의심하거나 그의 사진 솜씨를 칭찬할 수밖에 없다. 혹은 반문한다. 너는 이게 정말 맛있어서 올린 거니? 어쩌면 진짜 미식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구효선(프리랜스 에디터)

TOO MUCH TALKER

지난해 겨울, 셰프인 남편과 프랑스 레스토랑 투어 중 룩셈부르크에서 하루 머무르게 되었다. 시내 중심가보다는 낯선 마을이 궁금했던 탓에 ‘부르샤이트’라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선택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호텔은 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길마저 잃어 겨우겨우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험난했던 초행길에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며 아름다운 송어 요리와 함께 룩셈부르크산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단지 목을 축이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껏 마셨던 그 어떤 샴페인보다 만족스러웠다. 기포는 힘찼고 뉘앙스도 나름 섬세해서 식사 내내 남편과 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그 와인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시내의 마트 구석에서 뽀얗게 먼지가 덮여, ‘4유로’라는 가격표를 단 채 말이다. 저 싸구려 와인이 어제 우리가 그토록 환호했던 바로 그것이었다니! 아니, 이거야말로 ‘원효대사의 해골물’ 아닌가? 자조 섞인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의 미식 문화가 이렇다. 내추럴 와인이 트렌드의 정점에 서 있는 요즘, 일로 만난 한 요식업계 종사자가 내추럴 와인을 선택하는 이유가 단지 “와인 라벨을 촬영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내심 충격 받았던 적도 있었고, 70년 된 노포에서 양념 갈비를 서빙하시는 분의 “가장 맛있는 고기는 사진이 다 먹는 것 같다”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다. 미식은 대세가 됐고 훌륭한 음식(사진)과 코멘트는 넘쳐나지만 진짜 미식이 무엇인지만은 희미해졌다. 글/ 이상민(미식가)

음식이라는 기본

‘셰프’라는 단어가 멋지게 포장되기 시작한 지 이제 10년이나 됐을까? 요리사들 중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우리 직업의 본질은 다른 셰프들과 경쟁하거나 누가 더 뛰어나다는 칭찬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우리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당연하게도, 우리에겐(존중받아 마땅한) 각각의 성향과 방식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스타라고 하면 토마토, 오일, 크림 베이스, 세 종류만을 떠올리지만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맛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미식에 관한 한 특히 범람과 혼돈의 시대에 물론 셰프들 역시 미식 문화를 발전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소비자들 역시 조금은 성숙된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고급스러운 수준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일단 음식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글/ 박성우(‘리스토란테 스파크’ 셰프)

자랑을 위한 미식

오늘날의 푸디즘이 ‘아는 척’과 동의어가 된 이유 중 팔할은 역시나, 인스타그램에 있다.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인스타그램에서 찾는 게 지겹겠지만, 미식에서만큼은 정말이지 그렇다. 특히 몇몇 인플루언서들은 진짜 음식에 감탄하는 건지, 아니면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그 맛에 중독된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고 있자면 유럽보다 더 유럽 같은 서울 한복판을 느낄 수 있다. 이해 가능한 보편적 언어보다는 어려운 조리 용어로 허세를 부리고 그냥 쌀밥보다 ‘오분도미’, 프랑스산 버터, 이탈리아 어느 지역의 올리브 오일이 넘쳐난다. 진짜 단골집보다는 무작정 핫한 곳만을 일회성으로 방문한 뒤 그것도 굳이 ‘가오픈’ 기간에 찾았다고 강조하는 포스트를 보는 것도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요리연구가, 푸드 스타일리스트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오히려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만 모르는가? 글/ 김보선(푸드 스타일리스트)

GOOD LISTENER

파인 다이닝뿐 아니라 모든 음식들을 마주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다. 먹는 사람의 기분이나 마음가짐이 음식 맛의 반 이상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돋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레스토랑 직원과의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서버나 와인이나 음료를 추천하는 소믈리에가 그 레스토랑의 스타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니 그들과의 소통은 곧 나의 만족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그들을 옆에 멀뚱히 세워두고 SNS 혹은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내용에 의존해 주문을 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건 엄연한 시간 낭비다. 누군지 알 수 없는 타인의 취향이 나와 비슷할 확률은 무척 적으며 그 아무개가 모든 메뉴를 다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니 말이다. 직원들의 설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소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조리했는지 다 알 수 있을 테고 그 설명을 이해한 후 맛보는 플레이트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글/ 장보리(그랜드하얏트 서울 소믈리에)

미맹일 권리

TV만 틀면 ‘먹방’이다. 보기 싫으면 채널을 돌리면 되지 않냐고? 다른 채널에서는 다른 ‘먹방’을 한다. 물론 개중엔 꽤 유의미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일단 수적으로 너무나 많다. 마치 바닷가에 일렬로 늘어선 횟집을 보는 것만 같다. 어떤 집은 맛집, 어떤 집은 간판만 원조인 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시각적으로 기괴한 그 광경 말이다. ‘먹방’이 먼저인지, 음식에 관한 집착이 먼저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그렇다고 ‘먹방’을 규제하자는 일부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건 개인 선택의 문제인데 규제라니, 너무 갔다.) 어쨌거나 요즘 ‘잘’ 먹는 것이 미덕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미식과 함께 폭식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미맹은 마치 문맹인 양 지탄받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 와인은 산도가 높고 금속성의 미네랄이 느껴지네요.”란 만화책 <신의 물방울>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나? 어째서 늘 허기져 있지 않다고, 그냥 “맛있다”고 단순하게 평하는 것이 비난 혹은 동정의 대상이 됐느냐는 말이다. 제발 적당히 좀 먹고 적당히 좀 하자. 적어도 입안의 음식물은 삼키고 다음 메뉴를 주문해야 되지 않겠나. 글/ 김유나(배달의 민족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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