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선수들의 겨울

하얀 빙판 위에서 예측 불허한 뫼비우스의 띠를 그려나가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가장 초연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그녀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김예림이 입은 섬세한 자수와 시퀸이 장식된 튤 소재 드레스는 Antonio Marras, 레이스 프릴 블라우스는 Sandro 제품. 임은수가 입은 우아한 튤 드레스는 Son Jung Wan, 블라우스는 Sandro 제품. 안소현이 입은 입체적인 텍스처의 시폰 블라우스는 Andy & Debb Collection, 레이어링한 드레스는 Debb Ceremony 제품. 박소연이 입은 스카프 디테일이 더해진 드레스와 부츠는 모두 Fendi, 시폰 플리츠 스커트는 Debb Ceremony, 플라워 모티프의 이어커프는 J.W. Anderson by Net-A-Porter 제품.

임은수가 입은 티어드 장식이 더해진 도트 레이스 블라우스는 Johnny Hates Jazz 제품. 박소연이 입은 레이스 캡 슬리브 디테일의 드레스는 Romanchic 제품.

12월 2일 오전 9시 30분 목동실내빙상장.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2차 선발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로봇처럼 돌아가던 수십 대의 취재진 카메라, 모니터 위로 바쁘게 움직이던 심사위원의 펜촉, 급경사를 이룬 좌석 3층에 나란히 붙어 있던 응원 현수막. 불과 2주 전 화보 현장에서 만났던 수줍어하던 모습의 그녀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선수들은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는 강렬한 포즈를 취한 채 천막에 밀착되어 팔락거리고 있었다. 경기장 가득 발랄하고 경쾌한 ‘빨간 맛’이 BGM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리에 앉은 지 겨우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얼음장처럼 차게 식었다.

박소연이 입은 벨벳 드레스는 Altuzarra by matchesfashion.com, 블라우스는 Antonio Marras, 양말은 N°21, 슈즈는 Salvatore Ferragamo 제품.

가장 먼저 빙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마리의 흑조로 변신을 마친 박소연 선수다. 화보 촬영장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2014년에 백조를 연기한 적 있었어요. 예전부터 저는 흑조에 더 끌렸는데 나이도 어렸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접어두고 있었죠. 제가 직접 음악을 선정하고 안무와 컨셉트를 주도적으로 결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아무래도 흑조는 훨씬 강한 모습이기 때문에 제 스스로도 그러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2분 30초 동안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 채 코어에 잔뜩 힘을 주고 ‘블랙 스완’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고혹적이고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박소연 선수는 작년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세 번 올랐다. 여전히 통증으로 인해 진통제를 먹어가며 훈련에 임한다고 했다. 전지훈련 기간 중에도 발목에는 여전히 핀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지난 11월, 일 년 만에 출전한 오사카에서 열린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비록 12명 가운데 최하위 결과를 냈지만, 그 과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박소연의 스케이팅 경기는 작은 손동작 하나마저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안소현이 입은 꽃잎 모티프 레이스 소재의 로맨틱한 드레스는 Chloé, 주얼이 장식된 레이스 플랫 슈즈는 Manolo Blahnik 제품. 박소연이 입은 리본과 핀턱 디테일의 레이스 블라우스, 스커트는 모두 N°21, 골드 글리터 플랫 슈즈는 Jimmy Choo 제품.

“그때 너무 많이 긴장을 해서 몸이 말을 안 듣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항상 웃고 다니지만 연습할 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제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평창올림픽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쭉 참으면서 훈련을 해왔던 것 같아요. 전지훈련 기간 동안 가끔 일기를 썼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하루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하는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박소연 선수는 이날 경기에서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다시 태어나도 피겨스케이팅을 하겠냐는 질문에는 일말의 고민 없이 “아니요.(웃음)”라고 호탕하게 대답한 그녀였다.

“겉보기엔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그 안은 정말 치열하죠. 피겨스케이팅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스포츠는 아니에요.”

그녀의 말마따나 빙판 위에 불시착한 선수들의 점프 실수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절로 탄식을 내뱉게 만들었다. 넘어져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라. 아프고 속상해도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미소를 띠어라. 이 두 가지는 빙판 위의 보이지 않는 룰처럼 느껴졌다. 경기장 3층 꼭대기에서 선수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 자체가 꼭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안소현이 입은 티셔츠는 Recto, 스커트는 Debb Ceremony, 진주 목걸이와 귀고리는 1064 Studio, 장갑은 에디터 소장품.

담담하고 초연한 말투를 가진 안소현 선수에게 마인드 컨트롤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연기하는 음악을 들으며 각 요소들을 성공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스스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요. 가끔 넘어지는 순간이 떠오를 때도 있는데 그러면 갑자기 확 불안감이 몰려오죠.(웃음) 그냥 연습을 성실하게 하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사실 경기 할 때는 이런저런 생각 할 겨를이 없어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연기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집 바로 앞에 목동아이스링크가 있어서 친구와 함께 놀러 갔다가 뒤늦게 피겨의 세계에 입문했다는 안소현 선수는 파란색을 특히 좋아한다. 이번 시즌 동안 푸르른 의상을 입고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드라마틱한 음악에 맞춰 우아하게 프리 스케이팅 경기를 펼쳤다. 평창올림픽 1차 선발전 당시 쇼트에서 점프 실수로 인해 7위를 기록했지만 프리에서 침착하게 ‘클린’한 경기를 마쳐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력이 있다. 지난 10월 벨라루스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는 자신의 최고점을 경신하며 3위를 차지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시니어 공인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최다빈 선수가 올림픽 출전이 유력해진 상황에서 나머지 티켓 1장의 행방에 대해서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는 3차 평창올림픽 선발전의 결과는 1월 7일 공개된다.

임은수가 입은 크리스털 레이어드 목걸이 디테일의 시퀸 드레스는 Miu Miu 제품.

하얀 빙판이 꼭 인생과 닮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예측대로 결과가 흘러가지 않았던 숱한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6분이란 아주 짧은 웜업 시간 동안 더블 악셀을 화려하게 뛰었던 선수가 막상 본 게임에서는 삐끗했고, 반대로 연습 때 줄곧 엉덩방아를 찧던 누군가는 실전에서 매끄럽게 3회전 점프를 성공시키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꼬부기를 닮아 팬들에게 선물 받은 꼬부기 인형을 방 한쪽에 컬렉팅한다는 임은수 선수가 야무진 말투로 말했다. 주어를 생략한 채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점프가요? 그게 무서울 시기는 예전에 지났어요.(웃음) 이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빙판 자체가 미끄럽고 불규칙하기 때문에 그날의 컨디션이 아무리 좋다고 해서 점프가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무조건 결과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죠.”

연습도 실전처럼 임한다는 그녀는 종종 경기장 벽까지 날아간다.

“평소에 펜스에 잘 부딪혀요. 좁은 빙상장에서는 경기 도중에도 몇 번 그런 적 있어요. 제가 좀 예상치 못하게 멀리 날아가더라고요.(웃음) 스피드를 많이 내서 비거리가 높고, 멀리 날아가는 점프를 좋아해요.”

그녀가 피겨스케이팅이란 스포츠에 빠져든 계기는 옷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입는 의상은 멀리서 봐도 반짝거려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화려하잖아요. 그 옷이 너무 예뻐 보여서 입어보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경기 때 입었던 의상은 거의 다 옷장에 모아뒀어요.”

임은수가 입은 파스텔 톤의 컬러가 패치워크된 폭스 재킷은 Ds Furs 제품. 김예림이 입은 화이트 양모 퍼 재킷은 Michael Michael Kors 제품.

임은수는 지금 막 공항에서 내린 사람처럼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화보 촬영장에 등장했었다. 태릉에서 오전 훈련을 마치고 오던 참이었다. 가방 가득 스케이팅 용품이 들어있다고 했다. 이날 임은수는 인어의 비늘처럼 찰랑거리는 핑크빛 의상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선수들이 서로의 변신한 모습을 보고서 동시에 까르르 웃는 모습은 ‘내추럴’ 그 자체였다. 평상시 보기 힘든 순도 100%의 웃음이라며 사진가는 라이브 경기 취재 카메라처럼 멈춤 없이 셔터를 눌렀다.

김연아 선수의 은퇴 이후, 어찌보면 지금의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다시금 황금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은수, 김예림, 유영이란 놀라운 기량을 갖춘 선수들의 출현이 핑크빛 사이렌을 연신 울려대고 있으니 말이다. 작은 실수조차 없는 클린한 경기와 예술적인 부분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는 피겨 삼인방은 여러 대회에서 상위권 성적을 번갈아 갱신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이날 대회에서도 세 명의 선수는 시상대에 나란히 올라 메달을 목에 걸고 활짝 웃으며 기념 촬영을 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수 대기실에서 마주친 방상아 해설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새롭게 부상한 주니어 선수들의 성장 속도는 앞 세대 선수들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져요. 어떻게 보면 그건 오랜 기간 귀감이 될 만한 성실한 선수 생활을 보여준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주니어 선수들이 빙상장에서 그 모습을 함께 지켜봤으니까요. 은수와 예림 선수는 점프 수행은 말할 것도 없고 프로그램 구성과 예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퍼포먼스가 굉장히 강해요. 은수는 워낙에 타고난 끼가 넘치는 선수라서 정말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죠. 예림이 같은 경우는 굉장히 품격 있게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둘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졌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죠. 한 명의 독주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선수들이 함께 빙상장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저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김예림이 입은 드레스는 Kenzo, 장갑은 에디터 소장품.

보글거리는 앞머리에 활짝 웃을 때 보이는 교정기가 매력적인 김예림 선수는 반전의 매력을 가졌다.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뛰어놀고 공차기를 좋아했다는 무덤덤하고 터프한 말투를 가진 소녀. 그녀가 이번 시즌 프리 스케이팅 음악으로 고른 곡은 영화 <라라랜드>의 OST ‘오디션’이다. 초록색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빙판 위에서 에스(S) 자를 그리는 스텝 스퀀스를 연기할 때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

“올해 초 부상을 당했었어요. 작년과 비교해서 키가 8cm 훌쩍 크기도 했고요. 키가 자라면 확실히 힘은 더 생기고 같은 동작을 해도 훨씬 시원해 보여서 좋지만 반면에 점프할 때 몸을 컨트롤하기 더 힘들다는 걸 느껴요. 몸의 변화와 발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동시에 겪으면서 그걸 회복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 <라라랜드>를 봤어요. 한동안 계속 이 곡만 들었을 정도로 저한테는 많은 도움을 줬던 노래예요. 원래는 갈라 프로그램으로 사용했던 음악인데 시합용으로 바꿔서 새롭게 선보였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회전하는 고난이도 타노 점프는 예림 선수의 트레이드마크다. 가끔 인사동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하늘 높이 튀어오르는 팽이 장난감처럼 가볍고 산뜻하게 공중을 날아오른다. 평소 유튜브로 경기를 자주 돌려 보는 선수가 있냐고 묻자 네이선 첸이란 이름을 말했다.

“4회전 점프처럼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기술을 구사하는 남자 선수예요. 그 선수도 한때 부상을 당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더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 점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2차 대회에서 김예림은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실수 없는 클린한 경기를 펼쳤다. 평소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는 예림 선수는 하얀 빙판 위에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표정으로 스케이트를 탄다. 그건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순간이다.

모든 경기가 끝나면 진행 요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장내를 정리하는 동시에 갈라쇼가 열린다. 3층에서 비둘기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서 있는 빙상장 펜스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곳의 온도는 한결 더 차가웠고 선수들의 스케이트 날이 만든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피겨인들은 한번 빠지면 못 헤어 나와요.(웃음) 가끔은 저희끼리 농담처럼 하는 말이, 이렇게 추운 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라고 웃으면서 말하죠. 그럼에도 어떤 마력이 있어서 다들 여기에 있는 거겠죠. 피겨스케이팅은 블랙홀 같아요. 아름답고 우아하고 다이내믹하고 짜릿한 감정이 모두 합쳐진 전율 그 자체예요. 그래서 저는 가장 완벽한 스포츠라고 생각하죠.”

방상아 해설위원이 했던 말처럼 그날 저녁, 나는 뭐에 홀린 것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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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헤어 백 흥권
메이크업 김 지현
스타일리스트 안 정희
세트 스타일링 이 나경(Calla7)
기타 스타일링 어시스트/ 문희경
어시스턴트 이 병호, 김 민형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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