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티스트가 갑자기 시시해져버리는 시점은,예술에 대한 열정을 펼쳐 보이다 지쳐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는 순간이다.초창기의 영감과 젊음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위기가 찾아올 때,극복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파고드는 나르시시즘을 선택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 아티스트가,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 센세이셔널한 창작 활동을 펼쳐온 대중 예술인이 죽음을 목전에 둔 바로 그날까지 한순간도 버릴 것 없이 살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라 하겠다.
수많은 문화적인 실험이 들끓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데이비드 보위는 21세기를 넘어서까지도 색다른 음악과 스타일을 선보이며 기존의 가치관과 편견에 돌직구를 던졌다. 심지어 타계하기 이틀 전인 69세 생일에 <블랙 스타> 앨범을 발매해 록과 재즈,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 위에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시를 읊었을 정도다. 데이비드 보위는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고여 있던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을 두고 그가 우주로 돌아갔다고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범우주적 페르소나 때문만은 아니다. 보편적인 관념의 틀 밖에 있는 그의 자유로운 행위는 지구 중력을 벗어나 튀는 공처럼 보였다. 데이비드 보위가 기존의 관점에 천착하지 않는 변화와 멈추지 않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예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겸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패션을 사랑했고,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으며, 미술작품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전방위적 예술가인 데이비드 보위가 수집했던 미술품들이 11월 런던 소더비에서 전시되고 경매에 오른다. (데이비드 보위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보위/컬렉터>는 11월 1일부터 10일까지 런던 소더비 뉴 본드 스트리트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동안 컬렉터로서의 데이비드 보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그가 이룩한 비주얼과 사운드의 조화로운 경지를 떠올리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가 미술계와 나눈 창의적인 교감이 고스란히 음악에 투영되어 때로는 기괴하고 화려하게, 때로는 모노톤의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어쩌다 보니 미술품 수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우아하게 돈자랑을 할 수 있는 수단처럼 보이게 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작품 하나 하나가 그의 음악과 톱니바퀴처럼 물려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단순히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을 구매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감동하는 예술품에 애착을 느끼고 소유의 욕망을 실현하는, 아트 컬렉팅의 가장 순수한 단계에 있는 컬렉터였다. 그리하며 그의 컬렉션은 ‘예술’과 ‘예술 소유’에 대한, 이제는 촌스러워지기까지 한 본래의 가치를 소환해낸다. 데이비드 보위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내가 소유하고 싶었던 단 한 가지였다. 언제나 변함없는 자양분이었고, 나는 이를 활용했다. 내가 아침에 느끼는 기분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었고, 내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에 따라서 같은 작품이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켰다.”
보위의 미술계에 대한 ‘덕질’의 역사는 꽤 길고 끈질기다. 본인이 제프 쿤스,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을 직접 인터뷰 하겠다고 <모던 페인터스 매거진>의 편집국을 찾아갔을 정도다. 그는 예술비평가이자 후원가이며 아트 매거진 에디터였고 이후 아트북 출판사 ‘21’을 운영하기도 했다. 물론 그 역시도 이 출판사를 통해 미술계를 직접적인 농담거리로 삼는 대규모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작가 윌리엄 보이드와 함께 ‘Nat Tate’라는 가상의 미국 아티스트를 창조해(마치 지기 스타더스트와 알라딘 세인, 신 화이드 듀크 등을 창조한 것처럼) 그의 전기를 발간하고, 만우절에 큰 파티를 열었을 정도니까. 어찌 됐든, 데이비드 보위는 일찍부터 런던뿐 아니라 뉴욕, 베를린 등의 아트 커뮤니티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바스키아>에서는 1971년 팩토리에서 알고 지낸 앤디 워홀을 연기하기도 했다. 덕질의 완성은 자신이 직접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위 역시 많은 그림을 그린 미술가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소장하고 있던 컬렉션은 대부분 그의 삶과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컨템퍼러리 작품들이다. 해럴드 길먼이나 프랭크 아우어바흐 등의 영국 작가들이 가장 많지만, 마르셀 뒤샹과 장 미셸 바스키아 등 20세기 현대미술계를 이끈 선구자부터 파격적이고 비관습적인 실험적 작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와 그의 멤피스 그룹의 작품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프랭크 아우어바흐의 ‘Head of Gerda Boehm’, 바스키아의 ‘Air Power’, 데미언 허스트의 ‘Spin’은 언제나 새로운 감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스스로를 우주로 내던지는 데 두려움이 없던 데이비드 보위의 열정의 원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프랭크 아우어바흐의 풍성하고 입체적인 그림, 순간의 강한 붓질로 감정의 밑바닥까지 포착해내는 텍스처는 보위의 화려한 사운드 속에 담겨 있는 깊이 있는 노랫말과 본질을 다시 살피게 한다. 즉흥적으로 불타올랐다가 휘발되는 듯한 바스키아의 창의성도 무대에서 스스로를 불태우는 뮤지션의 삶과 닮았다. 데이비드 보위는 <뉴욕 타임스>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다른 아티스트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음악과도 닮았다. 그에게 뮤지션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컬러풀한 색을 조합한 만화경 같은 작품, 데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Spin’을 소유했던 그는 당시 충격적이고 대담한 작품을 선보였던 yBa(young British artist) 중 하나였던 데미언 허스트가 가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사랑했고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존경했다. 데미언 허스트의 주관주의는 결코 경박하지 않으며 뭉클하기까지 하다고 말이다.
파격적이고 도전적이며 추상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군으로 이루어진 데이비드 보위의 컬렉션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해럴드 길먼의 작품일 것이다. 해럴드 길먼의 작품은 언뜻 평화롭고 따스한 듯 보인다. 그러나 영국 미술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기존의 화단에 반기를 드는, 급진적인 작품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방 안, 메이드인 듯 보이는 여성의 생각에 잠긴 뒷모습을 담은 작품 ‘Interior(Mrs Mounter)’도 당시에는 파격이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우리의 삶에서 주변적인 것이라 여겨지며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존재들, 노동자 계급의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 그림을 사랑했다.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 그림에 있는 작은 단칸방의 리놀륨 바닥이나 난로 같은 것들까지 기억해냈다고 하니 말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다. 그의 예술 세계는 즉흥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촘촘한 사유와 자신만의 철학, 신중한 계산을 통해 발산하는 에너지에 가까웠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흡수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은 데이비드 보위. 그가 소유했던 수백 점의 작품은 이제 ‘데이비드 보위의 역사’까지 깃들여지며 또 다른 예술적 의미를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