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셰익스피어, 블레이크, 바이런 등 영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의 넋과 혼이 잠들어 있는 곳, 왕실의 결혼식과 대관식이 열리는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던 그 역사적인 공간이 패션계에 공개되었다. 바로 지난 6월 2일, 구찌의 크루즈 컬렉션이 런던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에 영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사원 웨스트민스터의 문이 열렸고, 성직자들이 조용한 걸음을 걷던 회랑은 모델들을 위한 캣워크로 변신했으며, 13세기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은 쇼의 배경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열리는 패션쇼이다 보니 영국의 혼을 바지 한 장에 팔아버린 것 아니냐는 논란의 시선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컬렉션은 그런 비난을 주춤하게 만들 만큼 영국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 바치는 컬렉션이었다. “저는 영국의 심미성을 사랑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감성 및 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런던을 노래하는 서정적인 시와도 같습니다. 런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운율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 영국 스쿨 보이, 열정 넘치는 신사와 로맨틱한 펑크 문화.” 처음 구찌가 크루즈 컬렉션을 런던에서 열겠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패션계 사람들은 ‘이제야’ 미켈레가, 혹은 ‘드디어’ 미켈레가 런던으로 갔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 가득해 보였던, 그래서 컬렉션의 부분 부분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던 영국적 감성이 드디어 제자리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작은 목소리마저 메아리치는 회랑에 장엄한 성가가 울려 퍼지더니 고요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회랑 너머에서부터 또각또각 모델들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오프닝 룩은 무지갯빛 스웨터와 영국 왕실의 견종인(찰스 2세가 편애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킹 찰스 스패니얼이 패치워크된 타탄체크 스커트 룩. 이어서 1970년대 후반 펑크 세대의 하위문화를 거쳐 빅토리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이 화려한 자수 장식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아주 노골적인 유니온잭 패턴의 변주도 함께하며 96개의 착장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미켈레 특유의 위트 있는 액세서리(종교적인 모자나 너드 풍의 안경, 요란한 슈즈 등)와 포토벨로 마켓에서 찾은 듯한 빈티지풍의 디자인 역시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윌 아이 엠과 콜라보레이션한 스마트 워치와 이어폰도 스타일링에 위트를 더한 요소. 여기에 에린 오코너, 자케타 휠러, 하넬로어 로츠 등 영국의 언니 모델들이 출동해 컬렉션에 힘을 더해주었고, 미켈레가 좋아하는 메시지 ‘Blind for Love’는 이번 컬렉션에서만큼은 영국을 향한 사랑의 찬가로 보였다. 애프터 파티는 피카딜리에 위치한 프라이빗한 맨션에서 열렸다. 파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애니 레녹스의 라이브 공연. 피아노를 치며 유리스믹스 시절 ‘Sweet Dreams’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사랑에 푹 빠진 듯한 눈길로 바라보던 미켈레의 황홀한 표정은 그에게 어떤 행복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크루즈 컬렉션에서 그 도시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베이스캠프를 떠나 그 지역으로의 여행을 제안하기도 하고, 그 도시의 놀라운 건축물을 소개하기도 하고 영감으로서 그 도시의 미학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미켈레는 작년 뉴욕에 이어 그의 추억이 담긴 도시들을 순회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가 두 번째로 선택한 도시, 런던에서 열린 이번 컬렉션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과학자, 시인, 작가, 예술가들의 넋을 기리는 듯 문학적이고 도발적이었으며 충분히 역사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