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욕망과 잔혹한 대립 사이. 배우 전미도와 이규형이 어긋난 사랑을 연기하며 맞이한 순간들.
이규형이 입은 재킷은 Acne Studios. 전미도가 입은 드레스는 JW Anderson. 귀고리는 Amondz.
오랜만에 무대 의상이 아닌 옷을 입고 만났는데, 어땠어요?
이규형(이하 이) 저 오늘, 화려했던 것 같아요. 뿔이 난 것 같은 모양의 머리띠가 실험적이더라고요. 전미도(이하 전) 같이 찍은 컷 중 목을 조르는 듯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공연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죠. 〈슬기로운 의사생활 2〉의 특별출연을 통해 소개팅 상대로 만난 이후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연인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어요. 서로 어떤 배우라 느꼈나요?
이 그때는 처음이라 너무 어색했죠. 전 누나가 연기할 때 치밀하게 설계하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날것 그대로 즉흥적인 방식을 즐기는 편이어서 의외였어요.
그래서인지 두 분이 페어인 공연을 보는 내내 애드리브가 이어지더라고요.
전 규형씨는 워낙 유연하고 열려 있는 배우예요. 감각적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받아주죠. 그래서 둘이 공연하는 날 애드리브를 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 애드리브를 주고받다 보면 한 신을 추가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인데, 연출부가 말려서…. 전 연습실에서는 거의 만담하듯 연기해요.
재킷, 베스트는 Ulkin. 오간자 소재 헤어 액세서리는 Q Millinery.
이 이번에 느낀 건 누나가 되게 다정한 사람이란 거예요. 원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데, 남을 배려하는 법을 끊임없이 연구하더라고요. 다정하게 말하는 법에 대한 책도 가방에 챙겨 다니고.(웃음) 전 규형씨는 생각보다 진중해요. 동생이어서 그런지 활발하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연기할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더라고요. 이 제가 요즘 웨이트 무게를 더 올렸거든요.(웃음)
〈스위니토드〉는 누명을 쓴 남자가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복수를 갈망하는 복수극이자 그를 소유하기 위해 이에 동조하는 여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죠. 배우로서 캐릭터의 동기는 전형적일 수 있지만, 감정을 표현할 때 해석의 여지가 많은 배역일 것 같아요.
이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몰입하고 있어요. 토드는 내면과 외면, 시종일관 분노에 사로잡혀 있죠.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15년 동안 감옥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낸 인물이잖아요. 평범한 사람이 극악무도한 킬러가 되기까지, 신을 저버리고 싶을 정도의 심정은 무엇일까 내내 상상했어요.
드레스는 Leho. 프린지 장갑은 Kowgi.
제가 이규형 씨의 공연을 본 날은 모든 울분을 속으로 삭이는 듯한, 절제된 감정이 돋보였는데 의외네요.
이 매일 달라요. 정해진 약속 이외에는 흐름에 맡기려 해요. 어떤 날은 내내 차분한 상태에서 한두 가지 부분에서만 감정을 터뜨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시작부터 조절하기 어려울 만큼의 분노가 표출되기도 해요. 계획을 해도 달라지기도 하고. 참 무대라는 공간이 신기한 것 같아요.
규형 씨가 연기하는 토드가 유독 시체를 재료 삼아 만든 인육 파이를 맛있게 먹는다는 후기가 있던데. 맞나요?
이 그래요? 항상 절반 정도 먹는 것 같은데. 전 진짜! (이규형 배우를 보며) 다른 배우들은 주면 한 입 정도 먹어. 이 겨울이라 공연장이 건조해서 식감이 좀 푸석해요.
그래서인지 규형 씨가 표현한 토드는 좀 더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하다고 느껴졌어요. 프레스콜 영상을 봤을 때 다른 배우들이 선보이는 토드 캐릭터는 예민하고 냉철한 인상이었거든요.
이 이번 역할을 준비하면서 몸집을 좀 키웠어요. 여러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라면 등장부터 위협을 주는 모습일 것 같았거든요. 공연하는 날도 매일 웨이트를 하고, 쉬는 날에는 축구 경기를 하고요.
재킷은 Moschino. 크리스털 소재의 베일은 Q Millinery.
전미도 씨는 6년 만에 러빗 역을 다시 맡았죠.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전 러빗의 욕망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토드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러빗은 놀라지만,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토드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순간이 있어요. 이 지점에서 ‘이 극이 블랙코미디구나’라고 깨닫게 됐죠. 비극적인 인물을 만나서 변하게 되는 희극적인 인물. 상대를 원하는 마음 때문에 모든 걸 뒤엎어버리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2막 ‘By the Sea’ 넘버가 기억에 남아요. 영화에서는 다양한 로케이션이 교차하며 팀 버튼 감독의 환상적인 미장센이 정점을 이루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잖아요. 무대는 오직 배우의 목소리와 감정으로 구현한 점이 흥미롭더라고요.
전 러빗에겐 절박한 장면이죠. 토드를 자신의 이상적인 세상으로 이끌기 위해 설득하는 곡인데, 그는 전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요. 오직 터핀 판사에 대한 복수만 생각하죠. 사실 혼자 떠드는 애처로운 장면이에요. 신나서 부르기도 했다가, 절박하기도 했다가, 애원하기도 하고. 그래도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고 표현하는 여자예요, 러빗은.
재킷, 베스트, 팬츠는 모두 Ulkin. 슈즈는 Cos.
두 배우의 공연에서 특히 러빗이 토드를 귀여워한다는 후기를 봤는데요. “상대가 귀여워 보이면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 두 사람에게도 유효한가요?
전 단점이 더 이상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제 기억이 가물하긴 한데(웃음) 손이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손이 통통하거든요. 그때 ‘귀여워 보이면 좋아하는구나’ 느꼈던 거 같네요. 이 바쁜 일상을 잘 챙겨주는 사람. 저는 한 작품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에 돌입하고, 안 겹치는 게 다행일 정도로 쉬는 틈이 없거든요. 이런 일상을 이해해주면 고맙죠.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무대에 올랐죠.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언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나요? 이번 공연에서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곡은 어렵기로도 정평이 나 있잖아요. 압도적인 대사 양과 불협화음에 가까운 음이 끊임없이 변주되고요.
이 벌써 열 번 넘게 공연을 했지만,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대본을 계속 펼쳐 봐요. 이렇게 준비해도 감정선이 무너지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너무 집중해서 틀릴 때도 있고…. 참 어려워요. 전 맞아, 너무 집중해도 내 목소리만 들려서 틀려.(웃음) 상대 배우와 오케스트라를 의식하며 노래를 부르면서도 동시에 머릿속으론 다음 가사를 신경 써야 해요. 이 수많은 변수가 맞물려 ‘클리어’되는 순간,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전 톱니바퀴처럼 딱딱 돌아갈 때! 동선이 많은 편이라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가사를 까먹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데, 그게 스케이트보드 타듯이 재밌어요.
이규형이 입은 재킷은 Acne Studios. 그래픽 톱은 Y/Project by 10 Corso Como Seoul. 팬츠는 Rick Owens. 슈즈는 Alexander Mc Queen. 전미도가 입은 드레스는 JW Anderson. 귀고리는 Amondz. 부츠는 Kowgi.
무대 연기의 특성상 종일 지속되는 연습 기간부터 막이 내리기까지, 수개월간 긴 호흡으로 캐릭터에 몰두해야 하잖아요. 작품이 끝난 후 캐릭터와 잘 이별하는 편인가요?
이 저는 몰입하고 빠져나오는 전환이 빠른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공연과 촬영을 병행하는 경우도 더러 있거든요.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복 받은 케이스라 생각해요. 전 어렸을 때는 여파가 길었던 것 같은데, 30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배우의 일과 일상을 분리하려 노력해왔어요. 공연하는 기간에는 역할에 집중하지만, 끝나고 나면 훌훌 털어버려요.
재킷은 Moschino. 귀고리는 Smfk. 부츠는 Ferragamo.
지난해의 마지막과 올해의 시작을 모두 공연장에서 보냈겠어요. 올해 무얼 이루고 싶나요?
이 촬영할 작품이 두 개 남았는데, 모두 끝나면 외국에 서너 달 정도 살아보고 싶어요. 슬슬 구체적인 계획을 짜보려고요. 단순한 여행이 아닌, 어떤 곳에 어떤 목적으로 가야 나에게 더 좋은 영향으로 다가올지 고민해보고 있고요. 전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합니다. 3개월의 장기 공연을 끝냈으니, 조금 쉬다가 하반기에는 더 밀도 있게 살아볼 생각이에요. 사실 드라마 〈서른, 아홉〉을 끝낸 이후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제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 고민했는데 〈스위니토드〉를 공연하는 몇 개월간 충분히 그런 시간을 보낸 것 같아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