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F/W 파리패션위크 둘째 날, 파리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마들렌 오페라 극장으로 게스트를 초대한 언리얼에이지(ANREALAGE)의 쇼는 판타지에 목마른 이들을 만족시키기 충분한 이벤트였다. 쇼가 시작되고, 무대 위로 등장한 모델들. 쌍둥이처럼 거의 비슷한 화이트 룩을 입은 두 명의 모델이 등장했다. 세 번째 룩이 나올 때 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올 화이트 룩의 컬렉션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네 번째 룩을 입은 모델들이 나타나자, 천장에서 빛을 내뿜는 두 개의 긴 막대기가 내려오며 반전이 시작되었다. 긴 막대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스캔하듯 지나가자 갑자기 패턴과 컬러가 등장한 것! 마법같은 놀라운 광경에 관객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까?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 인간과 다른 지각 세계를 가진 동물들을 이야기 할 때 쓰는 '움벨트(umwelten)' 란 개념에서 영감 받았다고. 다소 생소한 개념인 '움벨트'는 '같은 물체라도 자외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곤충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것과 인간이 바라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움벨트는 곧 자신만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뜻하는 셈.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여러분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종입니다.
자외선을 활용해 의상이 바뀌는 퍼포먼스가 돋보인 쇼는 컬러가 가지각색으로 변할지라도 결국 그 본질은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모리나가의 깊은 철학이 담겨있었다.
1950년대에서 영감받은 룩에 광변색 소재를 사용(이 소재는 3분 가량 자외선 노출이 지속되지 않으면 하얀색으로 다시 돌아온다.)했으며, 한정적으로 광변색을 적용할 수 있었던 소재의 종류를 인조모피, 벨벳, 레이스, 니트, 자카드 등으로 넓히며 기술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자연광의 강도가 끊임없이 변화함에 따라 색상도 끊임 없이 변화합니다. 시간에 따라 진화하도록 설계된 깨끗한 화이트 룩들은 자외선 노출에 따라 또 다른 색조들을 선보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해 나갈 것이죠.
'비일상의 시대'라는 뜻을 가진 브랜드 명에 걸맞게 보통의 일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기술을 접목한 패션을 선보이는 언리얼에이지의 수장, 모리나가 쿠니히코. 10년 전 처음 세상에 선보인 자외선에 반응하는 실험적인 소재의 탐구를 꾸준하게 이어간 결과, 지금에 이르는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었다. 2020년 컬레버레이션을 진행한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벤투리니 펜디가 왜 그를 '패션 과학자'라고 표현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쇼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