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큼한 마음이 들여다보인다는 의미 말고 겉과 속이 다름이 없어 환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속 보이는 안은진은 주변까지 환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데님 오버올은 Ellon Arc. 튜브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안은진 하면 아직도 ‘추민하’(〈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맡은 배역 이름)를 떠올리게 되는데, 배우로서 한 역할로 강력하게 각인된다는 건 축복일까 굴레일까?
저희 소속사 대표님은 아직도 제가 전화하면 “어, 추추~” 이렇게 받으신다.(웃음) 저는 너무 좋다. 그만큼 잘했다는 거고, 잘 어울렸다는 거고, 그걸로 사람들 마음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거니까. 게다가 그렇게 예쁘고 건강한 캐릭터로. 사실 저라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멋있지 않거든. 이보다 이미지메이킹이 잘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웃음) 그런 밝고 건강한 캐릭터를 또 잘할 거라고 믿어주시는 거고, 또 그것과 다른 캐릭터를 했을 때 ‘어? 이것도 잘하네?’ 해주신다면 그 또한 완전 득템 아니겠나!
4월 말에 방영되는 드라마 〈나쁜 엄마〉에서 맡은 미주라는 역은 어떤 캐릭터인가?
사실 미주는 준비할 때 좀 편안했다. 실제 저와 싱크로율이 비슷해서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남자에게만 쭉 꽂혀서 계속 짝사랑하는 역할이고. 더 좋았던 부분이 미주는 인생이 안 풀린다고 해도 늘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이다. 왜 우리가 도망을 가야 되냐고,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도 슬픔에 잠식되어 있지 않고 당차게 일어나고. 대본에 다 표현돼 있어서 대본대로만 잘 임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란 언니와는 전 작품을 같이 해서 언니가 슛 들어가기 전과 후에 어떻게 돌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슛 들어가기 직전까지 사람을 웃겨놓고 혼자 저렇게 집중을 한다고? 놀래키는 스타일거든. 근데 도현이는 미란 언니와는 처음이니까 좀 당황했었나 보더라. 극 중 엄마니까 진지한 신을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갔는데, 언니는 그냥 같이 놀다가 뿅 하고 들어가서 막 쏟아내버리니까. 근데 나중에 도현이도 거기에 적응을 해서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주더라. 그럴 때마다 전 정신 차려야 된다, 이 무서운 사람들한테 말리면 안 된다, 하면서도 돌아보면 또 계속 웃고 떠들더라. 현장이 너무 재밌었다. 나중에 나올 메이킹 영상이 살짝 두려울 정도로.(웃음)
올해만 〈나쁜 엄마〉에 이어서 〈연인〉까지 연달아 찍고 있다.
〈연인〉은 너무 너무 얘기하고 싶은 게 많다. 사극인데 대본이 정말 좋다. 황진영 작가님이라고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을 쓰신 작가님인데, 정말 거대하고 웅장한 서사이면서도 눈물 나는 한 사람의 성장기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연에 대한 이야기다. 시작은 아주 당돌하고 안하무인인, 자기밖에 모르는 애기씨인데 그녀가 전쟁과 사랑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이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작품이 될 거다.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절대 놓지 않는, 굉장히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걸 보는 모두가, 또 저 역시도 생에 대한 의지를 같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찍고 있다.
이렇게 연달아 작품을 할 때,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어림짐작을 해보자면, 현장에 따라 적응과 변신이 너무 어렵지 않은 쪽이어야 가능한 일일 것 같다. 배우로서 안은진은 어떤 역할에 빨리 빠져나오고 훅 들어가는 편인가?
초반에 적응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래도 운 좋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걱정할 만한 요소들이 현장에 가면 다 해결되는 곳만 만나서 그게 잘됐던 것 같다. 가기 전에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어떡하지?’ 걱정도 많은데, 가면 또 되는 걸 보고 ‘이렇게 우주의 기운이 나를 위해 도와주는구나’ 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쌓인 힘이 잘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20대 초반에 연기과 진학하고 ‘난 어떤 배우가 되어야 하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본인이 잘 못하는 것과 편안하게 하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어떤 걸 잘 못하고, 어떤 걸 편안하게 하게 되던가?
여전히 잘 못하는 건 화를 막 분출하는 역할. 그런 건 늘 어렵더라. 20대 초반에는 뭔가 이분법적으로 나누려고 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뮤지컬을 꿈꿀 때도 만약 〈지킬 앤 하이드〉라고 한다면, 주변에서도 넌 루시가 어울려 혹은 엠마가 어울려, 이렇게 두 가지로만 정의하니까. 살다 보면 꼭 그렇게만 정의할 수 없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잖나. 난 루시도 어렵고 엠마도 어려운데 뭘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많았는데, 갈수록 생각이 바뀐다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자기계발서라든지 〈세바시〉 같은 영상을 참 좋아하는데(웃음) 거기서도 그렇게 말하더라고. 변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바뀌어왔고, 계속 바뀌는 중이다.
레더 재킷은 Iro. 데님 쇼츠는 Insilence. 베레는 Grace Life. 벨트로 활용한 타이는 Bellnouveau.
개인적으로 안은진은 어떤 작품에서든 별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런 감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감사한 칭찬 같다. 그 캐릭터로 잘 놀고 있다고 봐주시는 것 같아서. 들어가기 전에는 늘 너무 긴장을 하고 ‘공부해야지, 은진아, 공부해야지,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 다그치는데 막상 또 현장 가면 결국 그 고민 끝에 닥치는 걸 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다 건강하고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즐겁게 임해야지.
스스로를 엄청나게 갈아 넣고 완전히 치열하게 몰입해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까?
사실 그런 걸 저도 한번 해보려고 했다.(웃음) 제가 팀 사람들과 너무 재밌게 놀고 그러니까 〈한 사람만〉이라는 작품 할 때는 감독님한테 저 이제 현장에서 좀 말이 없고 제 세계에 빠져있어도 오해하지 말아주시고, 상대 배우와도 역할이 가까워질 때 그때 가까워지겠다, 그래도 이해해달라고. 근데 막상 “아유~ 식사는 하셨어요~?” “어디 아픈 덴 없고?” 막 이렇게 되더라.(웃음) 안 된다, 천성이.
안은진의 또 다른 수식어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게 ‘한예종 전설의 10학번’일 거다. 이거 혹시 지겨운가?
전혀. 탑승해서 끝까지 가야지. 잊혀질 만할 때쯤 여기로 또 탑승하고.(웃음) 얼마 전에도 친구들 공연 보러 갔는데, 저희 학번이 다양하게 활동하는 친구들이 되게 많다. TV 나오는 유명한 배우들만 있는 게 아니라 공연에서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고. 지금 잘 안 보이는 친구들이 한 10년 후를 책임져주면 그때 또 거기 탑승해서 10년 가고, 그럴 계획이다.(웃음) 농담이고, 동기들이 어디서나 보이니까 저는 에너지를 정말 많이 받는다.
한예종 1학년 때도 수업 빼먹고 안 끼려고 뺀질거리기도 하다가 2학년이 되고 편하고 재미있어졌다고. 작품 전에 고민 많이 하다가도 현장 가서 해내고, 이게 안은진의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좌절은 하되 절망까지 가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자기 걸로 승화한다. 그 위에서 나는 나대로 놀아본다?
흠, 맞는 것 같다. 밑바닥을 찍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얘들아 나 힘들어” 찡찡대는 스타일인데(웃음) 친구들이 위로를 너무 잘해줘서, 제가 워낙 또 귀가 얇아서 말해주는 곧이 곧대로 금방 헤어나오는 것 같다. 너무 하소연 많이 하면 친구들이 질릴까 봐 조금씩 나눠서 한다. 찡찡이들이 버림 안 받으려고 그런 배분은 또 잘한다.(웃음)
볼캡은 Bellnouveau. 스트라이프 톱, 레더 재킷은 Golden Goose. 와이드 롤업 팬츠는 Patou. 슈즈는 Off-WhiteTM.
서른둘이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떻던가?
40대 때부터는 얼굴에 책임을 져야 된다고 그러더라. 배우라는 직업은 특히 더. 20대는 뭔가 예쁘고 반짝반짝한 걸로 가려질 수 있다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떤 사람인지가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고. 어렸을 때부터 그게 제일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안이 건강해야만 좋은 얼굴이 된다는 걸 늘 생각한다. 누굴 미워하는 데 에너지 쓰지 말자, 건강하고 예쁜 생각 많이 하자, 좋은 것 더 많이 보자, 같은 생각. 배우로서 또 어떤 경험들이 쌓여서 어떤 연기를 하게 해줄까, 기대감도 큰데 한편으로는 주변 친구들이 자꾸 결혼을 하니까 조급해지기도 하고. 그런 현실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인 것 같다. 흔들리는 30대 초반.
최근에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작품을 보면서 진짜 너무 너무 좋았다. 멀티버스의 이 산만한 이야기로 갑자기 이렇게 심장을 쿡 찌르는 연기를 하다니, 계속 놀라워하면서 봤다. 나이 들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그런 연기로 풀어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안은진이 나온 작품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 안은진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를 한다. 어떤 얘기가 들려오면 좋을 것 같나?
“너무 재밌게 연기하지 않아?”라고 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저는 늘 목표가 연기력 논란만 피하자, 작품에 피해만 주지 말자, 그거거든. 논란 없이 그냥 무난하게 넘어가면 이번에도 잘 넘어갔구나, 지나갔구나 하는데 그 사람 나오면 너무 재밌어, 너무 재미있게 연기해, 이런 말 들으면 제일 뿌듯할 것 같다. 그게 나한테는 잘한다는 최고의 칭찬 같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떤 사람인지가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고. 어렸을 때부터 그게 제일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안이 건강해야만 좋은 얼굴이 된다는 걸 늘 생각한다. 누굴 미워하는 데 에너지 쓰지 말자, 건강하고 예쁜 생각 많이 하자, 좋은 것 더 많이 보자, 같은 생각.